[에이안즈] 아름다워 보여 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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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9

 

 약속 날짜. 지난 만남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걸까. 날 대하는 태도가 사나웠으니 이전보다 더 좋은 곳으로 모셔갈 생각이었다. 그녀를 만족시키면 나에 대한 평가가 좋아질 것이라 여겼다. 오늘은 지난 주보다 더 잘 모시려고. 부담스럽다며 기사를 대동하는 것은 한사코 거절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고개는 도리도리, 손은 절레절레. 눈을 질끈 감고 '솔직히 부담스러워요' 라고 말하는 얼굴이 사랑스러웠다. '백 번 양보해서 좋은 레스토랑은 따라갈 수 있지만, 차는 정말 안 되겠어요. 이건 고려해주시면 안될까요?' 사랑스러워. 사랑스러웠다. 이 쯤 되면 언어가 부족하게 느껴질 정도야.

 약속장소에 나타난 그녀가 보였다. 나에게 등을 보인 채 서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날 찾고 있는 것이려나. 그녀의 뒤에 살금살금 다가가 어깨를 살며시 감쌌다. 히익, 하고 작은 놀라움을 뱉어냈다. 자신의 어깨를 감싼 내 검지 손가락을 오른손으로 더듬더니 손을 잡았다. 기뻤다. 고갤 살짝 돌려서 나인 걸 확인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안심인가.

"놀랐잖아요."

 여전히 퉁명스러웠지만 뭐랄까. 마냥 미워하는 마음만 있는 건 아니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애교 부리듯이. 내가 여자였다면 썼을 법한 말투. 그래, 애교 섞인 투정이 더 맞겠다.

"미안. 많이 놀랐어?"

"그 정도는 아니고요."

 내가 어깨를 놓아주자 재빨리 뒤로 돌았다. 몸과 몸이 가까웠다. 이렇게 가까이 있던 적은 많았을텐데, 가슴을 맞대고 있자니 감회가 새로웠다. 그러니까 이건, 뭐랄까. 아, 표현하기엔 내가 너무 부족해.

"멀리 오느라 힘들었지? 음료수 사줄까?"

"괜찮아요."

 나긋나긋한 목소리였다. 그녀는 활짝 웃었다. 오늘 이 미소를 자주 보길 기대했다. 예쁜 얼굴로 입을 벌려 웃는. 달콤한. 사랑스러운.

 오늘은 놀이공원. 어째서일까. 나는 미술관이나 연극 등을 보고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싶었다. 그러자 그녀는 '놀이공원에 간지 오래 되었다'니, '그런 곳이 싫진 않고 오히려 좋지만 아직은 너무 이른 것 같다'고 말했다. 내 옷소매를 슬쩍 잡아 당기며 말했다. 이건 그녀의 습관인가 싶었다. 아직은 너무 이른 것 같다면, 다음이 있는걸까. 속을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네게 좋은 것을 대접하고 싶다고 말하니, 다시 이른 것 같다고 말했다. 놀이공원에 한 두시간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에게 내 몸이 좋지 않다고 말하려 했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혹시 모를까. 하지만 그녀의 다음 말에 나는 놀이공원에 가기로 결정했다. 보지 않아도 자신이 정말 즐겁게 놀 예정이라고 말해서. 그렇다면 가야 할 게 아닌가.

 놀이공원이라는 주제에 알맞게 그녀는 발랄한 옷차림을 하고 왔다. 짧은 바지를 입어 어려보이기까지 했다. 풀고 다니던 머리를 하나로 묶었다. 또 다른 모습을 보았다는 게 기뻤다. 단아한 옷도 발랄한 옷도 잘 어울렸다. 그 둘은 정반대의 모습을 설명하는 단어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잘못 생각했던 것 같다. 단아함과 발랄함은 공존할 수 있었다.

"뭐부터 탈까요?"

 그녀는 나를 잡아끌었다. 원하는 대로 하게 내버려 두어도 괜찮겠지. 인파 속을 헤쳐나갈 생각을 하니 썩 좋진 않았지만 내가 누구와 함께인지 생각하면 뭐든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긴 줄을 서서 어느 유럽 민족의 이름을 딴 놀이기구를 탔다. 아마 그 민족은 자신들의 이름이 놀이기구에조차 쓰일 것이라고 상상도 하지 못 했을 것이다. 굳이 뒷자리를 고집해서 맨 뒷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그녀가 바깥쪽에 탔다. 안전바 하나만 믿고 저 높은 곳까지 올라갈 생각을 하니 막막했다. 안전바가 내려와 단단히 고정되었다. 그녀가 가슴에 손을 얹더니 내게 말했다.

"가슴이 두근거려요!"

 내 의견을 굽혀서 놀이공원에 오길 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 움직인다. 움직인다!"

 어찌 해야 이렇게나. 평소라면 새삼스럽게 굳이 말로 해야 하는지 작은 불만을 가졌겠지만 그녀라서 괜찮았다. 높이가 점점 더 높아질수록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여길 고집한 게 누군데 오히려 무서워하고 있기는. 거의 직각이다 싶을 정도로 높게 올라가자 그녀가 소리를 질렀다. 아주 편안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놀이기구를 온 몸으로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여 조용히 그녀에게 집중했다.

 어지러웠다. 두번째는 뱅글뱅글 도는 놀이기구였다. 정확한 명칭은 보지 않아서 생각나지 않는다. 컵 같은 게 있고, 그 컵이 빙빙 돌면서 컵 아래에 있는 바닥이 반만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무척 어지러워 보였다. 그녀가 원하니 탔다. 처음부터 강한 걸 타서 어지러워, 이번은 피하고 싶었는데 그랬다간 그녀 혼자 타게 되니까, 그녀가 재미를 덜 느낄까봐 또는 아예 느끼지 못할까봐, 그녀를 알아본 다른 사람들이 추파라도 던질까봐 꾹 참고 함께 탑승했다. 그녀는 놀이기구가 절정에 도달했을 때 쾌감을 느꼈는지 비명을 질렀다.

 세번째도 어지러운 놀이기구였다. 놀이기구의 생김새만 봐도 이건 어떻게 돌아갈지 감이 잡혀서 굳이 다시 생각하려 들진 않을 것 같다. 그저 수많은 놀이기구들 중 하나인데 뱅뱅 돌고 타고 나면 어지러운 거라고 생각하면 된다. 탑승하는 동안 몸이 한 쪽으로 쏠렸다. 바람을 맞으며 탄 거라 괜찮았다.

"으, 어지러워."

 너도 어지러움을 느끼고 있구나. 나와 같은 걸 느껴서 동질감이 생겼다. 나는 그녀에게 많이 어지럽냐고 물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관람차가 있으면 거기 타서 바깥을 구경하자고 말했다. 게다가 여긴 어지러운 것들뿐이니까. 흔쾌히 받은 승낙에 벤치에 앉아 있다가 자리를 옮겼다.

 긴장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대관람차에는 사람이 많이 없었다. 쉽게 탈 수 있었다. 기구는 천천히 내려왔다. 직원이 문을 열어주었다. 나는 문 옆에 서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가 잠시 의아한 얼굴로 보다가 곧 내 손을 붙잡고 기구에 탔다. 나는 그녀가 앉는 모습을 확인하고 뒤따라 탔다.

 마주보고 앉아있는 이 좁은 공간 속에서 어색함이 흘렀다. 어쩌면 나뿐일지도. 그녀는 괜찮아 보였거든. 바깥에 펼쳐진 동화 속 세상 같은 풍경에 마음을 빼앗긴 채로 감탄하고만 있었다. 순수한 아이 같은 모습에 마음을 뺏겨 바라보고 있었다. 너는 어떤 모습이든 예쁘구나.

“놀이공원에 와 있을 땐 꿈을 꾸는 것 같아요. 이국적인 건물들, 퍼레이드 속 화려한 옷차림들, 웃고 있는 사람들. 내가 속한 현실과는 정말 다르게 느껴지잖아요."

 그녀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신발을 신은 채 좌석 위에 올라가 무릎을 꿇고, 창밖을 내려다보던 중이었다. 그런 네게 젖어있었다. 네 말은 나를 현실로 이끌었다. 내가 속한 현실이 아닌 내가 바라던 현실로.

“당신은 어때요? 이곳이 참 어여쁘지 않은가요.”

 그녀는 자세를 고쳐 내려와 내 옆에 앉았다. 둘이 앉기에는 좁은 공간이었다. 내가 조금 더 벽에 붙었지만 몸이 닿는 건 불가피했다. 불쾌해하지 않을까 했지만 별 다른 말은 없었다. 밖을 응시하고, 응시하고, 응시했다. 나보다 작은 체구, 하나로 묶은 머리카락 속에서 드러나는 목, 오늘만은 내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생각해보았다. 생각조차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무슨 생각해요?”

 어쩌면 그녀는 내게 인간을 넘어선 존재가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이곳은 놀이공원이잖아. 꿈과도 같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어.”

 그녀가 뒤를 돌아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얼굴에는 장난기가, 어쩌면 매혹적인 것도 곁들여져 있을법한 표정이 깃들어 있었다.

“정말요. 이런 상황일수록 더 많은 생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나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턱을 들고 있어 턱선이 드러났다. 엉킨 속눈썹. 선명하고 뚜렷한 눈동자. 오늘은 입술색이 조금 다르네.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 보고 있자니 정말이지, 아, 나 정말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다.

 네 몸짓이 사랑스러웠다. 눈을 감으며 턱을 더 들어 올리는 것도, 내가 빤히 바라보고 있자 긴 속눈썹을 위로 들어 올리며 눈을 서서히 뜨더니 알 수 없단 얼굴을 하고는 고개를 왼쪽으로 기울이는 것도. 오늘은 괜찮겠지.

 내 무례함에 대한 너의 반응은 네 덕에 세상이 아름다워 보인다고 했을 때보다 더, 더 예뻤다. 내가 다가갈 때 굳어 뒤늦게 눈을 질끈―네가 눈을 너무 늦게 감아 속눈썹이 닿았는지, 아직도 간질간질 거리기만 했다―, 내가 닿을 때 눈 주변을 찡그리며 움찔, 내가 떨어질 때 서서히 펴지며 조심스레, 오히려 네가 눈을 감고 재빨리 쪽. 입을 맞추기 전 유지하던 그 거리로 돌아왔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 마냥 더 이상은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 나와 눈을 마주하고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바라보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벌렸다. 왼손으로 입술을 매만졌다. 약지는 윗입술에, 소지는 아랫입술에 닿아있었다. 뒤로 젖혀져 있던 검지와 중지가 긴장을 풀고 천천히 볼에 닿았다. 손가락을 굽히며 어깨를 움츠리고는 장난스럽게 히히 웃었다. 사랑스럽다. 사랑스럽다. 혹여 다른 사람에게 보일세라, 벽에 바짝 붙어 널 끌어안았다. 문이 열릴 때까지 놓지 않았다. 놓고 싶지 않았다. 놓아줄 수 없었다. 늘 지금처럼만 꼭 함께 있었으면.

 하루 종일 손을 꼭 잡고 다녔다. 대관람차에서 내릴 때 손으로 붙잡아준 뒤부터였다. 자잘한 간식거리를 먹을 때에도, 또 다른 놀이기구를 탈 때에도, 하염없이 거리를 거닐며 잡담을 나눌 때에도 떨어지지 않았다. 불가피하게 떨어져 있어야 했다면 손끝이라도, 그게 안 되면 옷자락이라도 스쳤다. 나는 그녀의 넘쳐나는 힘이 경이로웠다. 내 몸은 힘들었지만, 귀가하면 주치의를 불러야 할지도 몰랐지만, 정말 즐겁고 재밌다는 듯이 놀며 밝게 웃는 그 모습을 보자니 이제 헤어지자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내뱉을 생각은 없었지만.

 해가 저물어 사람들이 하나 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짧은 바지가 떠올랐다. 감기 들지 않을까 염려되어 춥지 않느냐고 물어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괜찮다’였다. 조금 안심이 되었지만, 그래도 완전히 마음이 놓이지는 않았다. 다른 파크로 넘어가는 길을 걷다 불빛이 반짝거리는 곳을 찾았다. 사진 촬영 장소인 듯한데, 주황색 가로등 불빛에 비춰진 분수가 참 예뻤다. 분수보다는 폭포 같았지만 사람이 들 수 있을 만한 대야에서 퍼붓는 물줄기에게 폭포라는 이름은 너무 거창한 것 같았다. 물이 고여있는 곳을 거닐 수 있는 대리석으로 된 받침대도 있었고, 아래로 떨어지는 물줄기 뒤에는 길이 나 있었다. 그녀는 총총, 이 길을 따라 올라갔다. 덩굴과 전선이 어우러진데다 어둠까지 내려앉아 신비로운 분위기를 내는 돌로 된 길이 나왔다.

“여기 꼭 그거 같지 않아요? 성에 있는 정원. 밀회를 즐길 수 있는 공간.”

 꿈꾸는 소녀 같은 모습에 또 한 번 감탄했다. 어쩜 그렇게 순수한 생각을 할 수 있는지. 아이 같았다.

“이런 곳에서 공주님의 손을 잡지 않을 수가 없지요?”

 그녀는 손을 내밀었다. 사랑스러움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손을 잡고 내 입으로 가져갔다.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내 행동에 그녀가 수줍게 웃었다. 웃음소리가 맑았다. 천천히 몸을 맞대고 허리를 끌어안았다.

“공주님께서 춤을 청하셔서 멋은 조금 빠졌지만.”

 잡은 손을 옆으로 가볍게 빼내 쥐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깍지를 꼈다. 그 행동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워 그녀의 손등을 볼에 비볐다. 눈을 감았다. 보들보들한 감촉이 느껴졌다. 남은 그녀의 손이 내 어깨를 스쳐지나 목을 끌어안았다. 다시 닿았다. 이번엔 좀 길게. 더 자연스럽게, 덜 어색하게. 달콤한 사과향이 코끝을 감쌌다. 그녀가 깍지를 낀 손을 빼 팔로 내 목을 감쌌다. 내 남은 팔은 그녀의 허리를 더 세게,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그녀의 허리가 젖혀지는 게 느껴졌다. 잠시 입술이 떨어지자 그녀가 히히 웃고는 양 손으로 내 얼굴을 감쌌다. 눈이 감길 때까지 내 눈을 바라보고 다시 다가왔다.

 손을 놓지 말아요, 나의 공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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