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8월부터 9월 말까지 노원문화예술회관에서 진행했었던 몽유노원도 전시회에 호진 작가님과 함께 작업했던 그림의 모티브가 된 글... 이라고 해야하나.
맨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사람의 키보다 높은 낭떠러지였다. 나무로 된 흔들다리 위에서 올려다보았다. 끝이 없는 것 같다. 낭떠러지에는 회색 돌과 미역 같은 청록색 축축한 색감의 풀들이 붙어 있다. 이 위에는 어떤 마을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름은 ‘비녀’였다. 비녀 마을.
나는 휴가 겸 여행으로 비녀 마을 밑에 자리한 A 마을에 왔다. 평화로운 곳이었다. 내가 머무르기 전까지는. 그렇게 하기로 결정한지 얼마 되지 않아 비녀 마을은 A 마을에게 선전포고를 하였다. 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은 늘 그렇듯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갔을뿐더러 고운 모습의 건축물들을 무너뜨려 잿빛으로 만들고 불까지 붙여 놨다. 나는 이 마을을 위해 전쟁에 참가하기로 결정했다. A를 침략한 비녀에게 들키지 않고 전쟁에서 조금이라도 더 유리한 상황을 만들기 위해 레지스탕스처럼 활동했다. 들키지 않도록 숨었고, 조심스럽지만 대담하게 행동했고, 비녀 마을의 병사가 지나갈 때에는 숨을 죽인 채 나와 다른 사람들이 보이지 않도록 건물 벽에 바짝 붙어 있었다. 어느 건물의 공용화장실에 가서 작전을 펼치려다 비녀의 병사에게 들켜 죽기살기로 도망친 적도 있었다.
그 즈음 내 나이 또래의 젊은 남자 하나를 만났다. 그는 전쟁이 진행된 후에 A에 나타났다. 이름은 민. 차분한 머리카락도, 허벅지를 가리는 코트도, 다리를 감추고 있는 스키니진도, 신고 있는 구두도, 눈동자도 모두 검은 색이었지만, 피부는 아주 새하얀 색이었다. 어쩜 사람이 그렇게 흰 살을 가질 수 있었을까? 어린 여자아이들이 읽는 인터넷 소설 속의 남자 주인공처럼 그는 잘 생겼고, 능력도 있었다. 심지어 성격도 무뚝뚝하지만 친절했다. 그는 대외적으로는 비녀의 사람이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실은 A의 사람이었다. 한 마디로 흔히 말하는 첩보원, 스파이였던 것이다. 나이대가 비슷해 보여서 그런걸까, 그 남자와 나는 함께 맡겨진 일을 행하러 나가기도 했었다. 간단한 일을 몇 번 나가다보니 나에게는 유대감이 생겼고, 잠시 여유가 생겼을 때 장내를 산책하기도 했다. 전쟁 중에도 장이 열렸다. 아마 전쟁의 손아귀에서 조금은 벗어난 지역이리라. 그렇지 않고서야 일본 애니메이션 속에 나오는 유카타 입는 여름 축제처럼 주황색 불빛이 가득하고 사람도 많은 장이 열릴리가. 장을 구경하며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이 곳의 생생한 분위기와는 다르게 우리는 전쟁 속에 살았으니까. 심지어 그 전쟁에 참가했으니까. 평소라면 이런 저런 말을 하며 시간을 보냈겠지만 전쟁이 내 기를 다 앗아가버려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런 우리의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예쁘기만 한 밤하늘은 새까맸다. 그 안에 반짝반짝 빛나는 별들이 있었다. 검은 천 위에 반짝이는 가루를 솔솔 뿌려둔 것 같았다. 그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전쟁이 언제 끝날까?"
내가 입을 열었다. 그러자 그가 말 하길,
"금방 끝날거야. 그럼 너도 네가 살던 데로 돌아가겠지?"
"아마도."
"이방인인 네가 전쟁에 휘말리게 된 건 유감이야."
어째서인지 그 말이 큰 위안을 주었다.
며칠 뒤 새로운 일이 내려왔다. 이 전쟁은 A에게 불리한 전쟁이었다. 비녀는 잔혹했다. 전쟁에 대해 현명한 의견을 가지고 있는 어느 노인을 찾아가 조언을 듣고 오라는 일이었다. 얼핏 들으면 간단하게 느껴질 일이겠지만 그 노인이 변두리이긴 하나 비녀 마을의 영역 안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낮선 이방인인 나로서는 위험한 일이었다. 민이야 그렇다 쳐도 나는 그 마을에 단 한 번도 방문해보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는 믿음직스러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를 조금 의지하기로 했다.
일은 어두운 밤에 실행이 되었다. 초록색 불빛이 마을에서 새어나왔다. 마을의 가장 으슥한 출구로 나가 비녀 마을과 가까운 절벽으로 갔다. 그 곳에 건너편 절벽과 이어둔 두꺼운 밧줄이 매달려 있었다. 그를 바라보니 그는 어느새 새까만 고양이로 변해 있었다. 아마 이 곳을 비교적 안전하고 가볍게 가기 위해서 그런 결정을 하게 된 것 같았다. 고양이로 변한 그 남자는 손쉽게 건너편으로 이동했다. 나 역시 그 남자처럼 가볍고 민첩한 동물이 되어 건너갔다. 안전하게 건넌 뒤 다시 사람으로 변해 옷을 다듬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두운 밤의 산이었다. 저 멀리 초가집 한 채가 보였다. 사람이 드나들만한 문 대신 벽의 10분의 4는 차지하는 것 같은 창 없는 창문이 있었다. 안쪽에 15년전에나 출시되었을법한 몸집이 있는 텔레비전이 있었다. 텔레비전은 의미없는 영상을 내보내고 있었다. 안 쪽에서 수염이 하얗고 머리는 거의 남아있지 않은 노인이 나왔다. 우리가 올 것을 미리 예상하고 있었던 것 같다. 노인은 우리에게 우선 이 창문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창틀에 엉덩이를 걸치고 몸을 돌려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노인은 입을 열었다. 노인이 전해준 말들은 비녀 마을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그것이 이 전쟁을 정당화시킬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비녀가 사람과 생명체를 개조하여 괴물체를 만들어 산에 풀어놨다는 말도 전해 주었다. 그것을 해치워야했다. 별안간 나와 민이 온 쪽에서 군인들이 오는 소리가 들렸다. 노인은 할 이야기가 더 많은 것 같았지만, 우리를 급하게 내보냈다. 우리는 어찌보면 무책임하게 그 친절한 노인을 건장한 군인들의 압박 속에 남겨 두고 온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무사히 귀환했다.
그 다음 임무를 기다리며 다른 활동을 하고 있을 즈음 민이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그와 나는 일을 몇 번 같이 한 동료 사이에 유대감, 혹은 그 이상의 감정이 있을 수는 있으나 알게 된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인지라, 그에게 불필요하게 많은 마음을 쓰지 않았다. 큰 일이 내려왔고, 비녀 마을에서 풀어 놓은 괴물체들을 끝까지 제거해야했다. 민의 생각이 나기는 했다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기 때문에 나는 어쩐지 마음에 걸리는 감을 가지고 일에 임하게 되었다. 나와 비슷한 여자 동료들과 함께 말이다. 괴물체들을 풀어놨다는 곳으로 향했다. 본격적인 일을 시작하기 전에 일시적으로 몸을 작게 만들어주는 약을 먹었다. 그러자 15cm 자로 한 번에 측정할 수 있을 정도로 작아졌다. 돌로 만든 벽이 있었다. 이 벽에는 높이가 20cm 정도 되는 위로 긴 직사각형의 틈이 있었다. 아주 덩치 크고 뚱뚱한 문지기가 자는 틈을 타 그가 지키고 있던 틈새 사이로 들어갔다. 그 틈새는 꽤 길었다. 어떻게 이런 공간을 만들 수 있었을까 싶었다. 멀리 있는 빛만을 바라보며 어둠 속을 헤쳐나갔다. 빛을 따라 밖으로 나오니 몸이 다시 쑥 커졌다. 내가 나온 곳은 노란색 바탕에 붉은 색 커다란 동그라미가 있는 플라스틱 버섯집이었다. 스머프가 살 것 같았다. 실제로 비슷했다. 작은 동물들이 사람처럼 옷을 입고 조심스럽게 나와 나에게 말했다.
"우릴 구하러 와 주신건가요?"
"아, 살았다!"
"제발 도와주세요. 괴물들이 너무 무서워요."
알았다 그랬다. 그들에게 꼭 이 일을 마무리 시키겠다는 말을 하고 동료들과 함께 길을 떠났다. 민의 생각이 났다. 조금 걸으니 푸른 풀밭 위 연한 하늘색의 유리로 된 방이 있었다. 이 안이다, 싶어 들어갔다. 벽이 들쭉날쭉하고 많아 복잡한 구조였다. 미로같은 방을 계속 들어가다보니 아주 덩치 큰 사내애가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독일계 소년처럼 보였다. 피부는 하얀 색, 눈썹은 거의 없는 것 같았고 머리카락은 홍당무 같았다. 눈은 푸르고 살이 아주 통통하게 부풀어 올랐다. 끔찍하게 컸다. 이게 정녕 사람의 몸인가 싶었다. 그 애는 의자에 의기소침하게 앉아 있다가 우리가 오는 소리를 듣고 뒤를 돌아보았다. 얼굴이 공포감으로 새하얗게 질려 버렸다. 우리는 모두를 해치우겠다는 당찬 포부로 그 남자애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나만 해도 발로 걷어차고, 물건으로 내리쳤으니까. 그런데 그 애는 우릴 공격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그저 울기만 했다. 한 대씩 맞을 때마다 몸집이 조금씩 작아졌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 아이는 보통 아이와 같았다. 나는 공격하기를 멈추고 처음으로 그 아이를 한 사람으로 대했다. 울어서 달래주고, 무턱대고 공격해서 미안하다고 달래며 안아주었다. 그러자 그 아이는 말했다. 엄마가 보고싶다고. 그 아이의 어머니는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나는 아이를 어머니에게 데려다 주었다. 그러자 어머니는 미안하다고 울부짖으며 그 아이를 끌어안았다. 우리는 계속 길을 떠났다.
착잡했다. 괴물체라는 표현을 쓰긴 하지만 나와 다름없이 감정이 있어서.
풀밭을 걸어가다보니 검은 기계가 나타났다. 레고로 만들어진 아구몬처럼 생겼다. 착잡해하던 마음은 어디로 가고 그런 괴물체를 잡아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공격 하려고 자세를 잡았지만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벌써부터 이러면 어쩌나 싶었다. 비녀 쪽에서 많은 괴물들을 만들어냈을텐데. 그런데 우려와는 다르게 금방이었다. 비록 우리를 공격하긴 했으나 장검을 들고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로로 싹 베니 하얀 빛과 함께 분해되어 부품들이 땅으로 떨어졌다. 그 빛 속에서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툭 떨어졌다. 끔찍했다. 그 고양이는 익숙했다. 나와 함께 일을 하고, 나와 함께 여가를 보내고, 나와 함께 웃기도 했던 동료가 변한 모습이었다. 하늘이 무너진듯한 기분으로 그 고양이에게 달려갔다. 검은색 톱니바퀴와 나사 사이에 힘 없이 떨어져 있었다. 고양이를 끌어안았다. 상처로 인해 검은 몸체에서는 붉은 기가 돌았고 눈을 뜨지 않았다. 그 충격으로 나는 모든 일을 관두고 시체를 안고 귀환했다.
검은 고양이는 내가 죽인 것이 맞았다. 부검 결과 사망 시각과 나와 만난 시간이 일치했다. 내가 내 동료를 죽였다는 것이, 나에게 이유 없이 큰 위안을 주었던 민을 죽였다는 것이 견딜 수 없을만큼 괴로웠다. 전쟁이 원망스럽다가도 괜찮아졌다. 생각보다 괜찮아해서 내가 혐오스러워질 지경이었다. 그러면서도 더 이상 그가 함께일 수 없다는 것이 사무치게 슬펐다. 좋은 사람의 숨통을 내 손으로 끊어버렸다는 것은 나를 죄책감이 가득 담긴 유리 상자 안에 넣고 나올 수 없도록 문을 잠그어 버린 느낌을 주었다.
민의 장례식이 진행되었다. 이미 죽은 몸이기에 사람으로 되돌아올 수 없었다. 장례는 간단하게 치러졌다. 나는 검은 옷을 입고 참석했다. 나와 그의 룸메이트였던 젊은 남자와, 그 배에 함께 타고 있었던 몇몇 선원들 뿐이었다. 쓸쓸한 장례식이었다. 그의 룸메이트는 내게 민의 유품이 있으니 가져가라고 했다. 나는 그러겠다고 했다.
그들이 살고 있는 배는 제국주의 시대 영국의 거대한 배 한 척 같았다. 나무로 이루어져 있었고 커다란 돛이 몇 개씩 있었다. 룸메이트는 나를 방문 앞까지 데려가 민의 물건들을 내 주었다. 옷가지들과 시계, 책 등의 간단한 물건들이었다. 생전 완전히 그의 소유였던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나는 그 물건들을 받아들었다. 그러자 민이 사라진 날 이후의 일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사라졌었다. A 마을을 돕고 있던 스파이라는 것이 비녀 마을 측에 들통 났기 때문이다. 배신의 대가는 실타래에 얽힌 실처럼 길었다. 모진 고문을 몇 번이고 당했다. 구타도 당했다. 정신이 혼미해져 기절하면 찬 물을 부어 깨우고 심문했다. 그를 심문하던 가장 높은 관계자는 그를 고문하는 것을 멈추게 했다. 그리고는 곧장 연구소로 보냈다. 연구소는 살과 장기를 헤집어가며 그를 개조해 기계와 결합시켰다. 그리고 나와 만났다. 이걸 알게 되자 억눌러왔던 감정이 흘러나와 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내가 그 사람을 좋아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 더 서글펐다. 나는 그의 유품을 꼭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