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많이 혼란스러운 시기다. 오늘만 해도 암살자라는 나부랭이들이 내 목을 노렸으니. 난 일개 황실 소속 기사단인데도 말이야. 금방 꺼질 줄 알았던 반란의 씨앗은 흙 속에 숨고, 싹을 틔워서, 우리의 숨통을 조이고 있다. 꽤나 커져서 가벼이 웃고 넘길 정도가 아니다. 황실에서도 그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고, 기사단 역시.
이런 시류와는 별개로 넌 내 연인이지.
작은 아이에게 평민의 옷을 구해 오라 이르고, 그 옷을 받아 품에 넣었다. 오늘은 이 옷이 방해하지 않을 거야. 사실은, 이 옷 한 벌로 그 무엇도 영원히 우릴 막지 않았으면 좋겠어. 싼 염료로 물들인 옷을 입고 인파 속에 뛰어들었다.
“안즈 쨩!”
크게 열린 장시는 발 디딜 틈이 없고, 널 부르는 내 목소리는 묻히기만 하지. 이 흔한 색들. 칙칙한 빛들. 그래도 이 속에서 널 찾는 건 어렵지 않아. 늘 숨기던 머리카락이 활짝 핀 꽃 같다.
“쉿. 그리 부르지 말래도.”
“그럼, 여보?”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리는 모습도 예뻐. 얼굴을 붉히며 손사래를 치고, 나로부터 네 시선을 돌리고,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로 그런 건 어디서 들었느냐 묻기만 하고, ‘아이, 참’을 연발하는 네가 좋기만 해. 우리는 평화 속에 있어. 다른 사람들처럼. 평민처럼. 매일 생계를 걱정하고, 물건을 내다 팔고, 농사를 짓는 대다수처럼. 우리는 평화 속에 있어.
너의 손을 잡고 사람들을 헤치며 지나간다. 잠시만요, 잠시만요. 제가 급해서. 죄송해요. 네가 하는 말들. 예의 있는 모습이 좋아.
복잡한 시장을 나와 숲으로 들어간다. 우리를 숨겨줄 숲이다. 조금 더,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자. 사람의 인적이 드문 숲이다. 이쯤이면 될 거야. 네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사람이 있나 없나 살피는 것이겠지. 혹시나 우릴 알아보고 미행이라도 했을까봐. 앞으로 나눌 사랑을 훔쳐 볼 사람이 있을까봐.
한참을 살피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두 눈을 가볍게 감고, 입을 모아 후, 하는 모양이 귀엽다.
“이제 됐어?”
“응, 됐어.”
그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내 품에 뛰어든다. 어깰 꼭 붙잡아 더 깊게 안고 네 몸을 만진다. 네 입에서 나오는 말은, 보고 싶었다는 말.
“보고 싶었어, 보고 싶었어. 어찌나 갑갑하던지. 내 사랑, 너 없이 어떻게 살려나 몰라. 응?”
고개만 쏘옥 들어 강아지 같은 눈빛으로 바라보고는 내 목에 팔을 두른다. 내 손은 네 허리에 가 있다. 오늘의 너는 레몬 맛이 나. 웃음을 참을 수가 없다. 후후, 웃자 뭐가 그리 즐거운지 묻는다. 너랑 함께 있는 게 즐겁지 않을 리가. 그러자 얼굴이 다시 붉어진다. 이렇게 순진해서야 원. 귀엽다. 나의 여인.
그간의 그리움을 한 때의 키스로 말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만, 키스만 하고 헤어지기엔 나눌 이야기가 많아 육체는 여기서 잠시. 네 어깨를 오른팔로 감싸 안고 나무 밑에 앉는다. 솔솔 불어오는 바람이 좋다. 네가 입은 쥐색 치마가 좋다.
“……그래서, 동전들이 떨어진 거야. 그러자 아케호시가 눈을 빛내며 줍다가 탁자에 머릴 부딪힌 거 있지.”
“정말? 후후, 많이 아팠겠다. 머리에 구멍은 안 났대? 내가 내 주어야 하는데.”
“여보!”
“어머, 실수. 근데 날 여보라고 불러 주는 거야?”
두 팔로 내 허리를 꼭 안아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네가 여보라고 먼저 했으면서…….”
사랑스럽다. 사랑스럽다. 언어가 부족하구나.
이 시간은 달콤했지만, 우린 우리의 본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서로 일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했지만, 시대가 시대인 만큼 말을 안 할 수는 없다.
“안즈 쨩.”
“응.”
내 목소리에 섞인 것이 무엇인지, 너는 알겠지. 네 목소리는 사뭇 진지해지고, 눈빛은 전략가의 것이 된다.
“안즈 쨩도 알겠지만, 요즘 상황이 그리 좋지 않지?”
“그렇지.”
“황실 쪽도…… 자세히 말 할 수는 없다만, 혁명군들의 머리에 구멍을 낼…… 아니. 혁명군들을 최대한 많이 제거할 수 있는 무기라던가, 전략을 준비 하고 있어. 그건 혁명군도 마찬가지지?”
“그렇지.”
어쩌다 우린 이런 시대를 탔을까?
“내전이 시작되면 우리 이렇게 만나지 못할 거야.”
“응.”
“전쟁터에서나 만날까?”
“그러겠지.”
덤덤하게 대답하지 말아줘, 안즈 쨩.
“그래서 말인데, 안즈 쨩. 우리 결혼 할래?”
“응…… 뭐라고?”
“꺄! 안즈 쨩, 방금 수락 한거야?”
“잠깐, 잠깐. 나루카미. 우리 진정 하고? 찬찬히 얘기 할래? 어쩌다가 이야기가 거기로 샜지?”
심통이 난 듯, 찡그린 얼굴로 내게 항의 하는 모습도 좋다. 무거워졌던 분위기가 한 번에 밝아진 것 같아 기쁘다. 내게 투닥거리면서도 싫어하지 않는 것 같아서.
“혁명이 끝나고 결혼하기엔 너무 늦어.”
한 쪽이 없을 지도 모르지. 두 쪽이나.
“그럼, 그럼 언제?”
“다음에 만나면 식을 올리자. 우선은 간소하게나마. 그리고 이 모든 게 끝나면, 황실 못지않게 화려하게 올리자. 혁명군에게도, 황실에게도 축하 받으면서.”
일이 더 바빠져 낮에는 도저히 만날 수가 없었다. 밀회는 모두가 잠든 밤에나 가능했다. 교회의 뒷문에서. 공동묘지가 있는 그 곳에서 우린 만나기로 했다. 커다란 천을 한 장 챙겼다.
그리고 예복을 입고 그녀에게 가는 중이다.
내가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아 그녀가 도착한다. 어쩜 이리도 아름다울 수 있나. 천 속에 숨기거나 풀어놓기만 했던 머리카락을 곱게 땋아 왼쪽 어깨에 내린 모습이 찬란하다. 훤히 드러난 어깨에서 빛이 난다. 얌체같이 네 곡선을 숨기고 있는 드레스가 아름답다.
“안즈 쨩, 오늘 정말 예뻐…….”
“예쁘기만 해?”
“아름답고, 순결하고, 또…….”
말을 하던 내 입을 입술로 막고는 살며시 웃는다.
“우리에겐 시간이 없잖아.”
옷매무새를 다듬고, 단추를 다시 한 번 잠근다. 이 소박한 결혼식에 준비 된 건 신랑과 신부 뿐 이지만, 우리의 결혼식은 그 어떤 식보다 더 아름다울 거야.
보름달 아래에서. 교회 뒷문에서. 묘비들 앞에서. 우리는 마주보고 서 있다. 서로의 손을 감싼다. 시선을 맞춘다.
“당신은 평생 저를 사랑하시겠어요?”
“그럼요. 안즈 양은, 영원히 저를 사랑해줄래요?”
“당연하죠.”
“이 시간부로 두 사람은 운명을 함께 하게 되었음을 선언합니다.”
그 어떤 성스러운 축복도, 많은 사람들의 축하도 없이 서로가 서로에게 맹세를 할 뿐이지만 어찌나 달콤하고 아름다운 식인지. 누군가 꿈이 아니라고 해 줘.
준비한 반지가 없었다. 서로를 위해서였다. 무언가가 달라졌다간 추궁을 받아 상대가 위험해질 수도 있으니. 내가 그녀의 왼손 약지에 입을 맞추고, 그녀 역시 내 왼손 약지에 입을 맞춘다. 우리의 결혼식은 이렇게 끝난다.
“자, 안즈 쨩. 우리 이제 뭐 해야 하는지 알아?”
“어…… 그렇지요? 여보.”
가볍게 키스를 나누고 밤의 숲으로 들어간다. 오늘은 그리 깊이 들어가지 않을 거야. 그저 일을 치를 수 있을 정도로만.
커다란 나무 밑에 천을 깔고 너를 눕힌다. 이 바닥이 싫지는 않을까. 풀벌레들이 올라오지 않을까. 이리저리 걱정은 되지만, 우리 꽤 열악한 상황이니까. 모진 상황이니까.
“무서워.”
널 안심시킨다. 아프게 안 할게. 널 내 밑에 두고 그대로 얼굴을 묻는다. 밀어내면서도 끌어당기는 네 손. 나를 얽매는 가느다란 두 팔. 보름달이 무색할 정도로 달빛도 가려지고 끈적이는 소리만이 들려오는 숲이다.
“우리, 아이 가지면 어떡하지?”
“황실과 혁명군 사이에서 난 아이인데, 평화 협정의 계기 정도는 되지 않을까?”
“정말이지, 이럴거야?”
하지만 웃고 있다. 정말 그렇게 되면 모두에게 좋을 테니까. 너의 친구들에게도. 나의 친구들에게도. 앞으로 태어날 우리의 아이에게도. 운명을 같이 하게 된 우리에게도.
“사랑해.”
바람과 함께 내 피부에 부딪히는 네 목소리에 나는 우리가 꼭 행복할 거라고 확신한다. 모든 게 끝나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고, 모두에게 축하 받고, 너와 나를 닮은 축복받은 아이도 낳고, 가끔은 말다툼 하면서도 서로 화해하고, 결혼기념일에 이보다 더 멋진 옷을 입고 자축하고, 늙어서 손자를 보고. 우리 그렇게 살자. 그렇게 행복하자. 나의 반려자여. 우리 꼭.
홀로 모진 고문을 당하는 너를 볼 때도 확신이 여전했다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던 머리카락이 강제로 드러나고 잘려졌다 잘려진 머리카락이 바닥에 아름답게 수놓아지는구나 이 어둡고 칙칙한 감옥에서 유일하게 아름다운 광경이야 네가 고문 당하는 걸 보며 혼자 눈물을 삼키고 너보다 훨씬 큰 사내들이 전략을 내놓으라는 협박을 해도 꿋꿋하게 앉아있는 너 참 용감하구나 그 자리에 외로이 앉아 있는 내 아내에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혁명이 시작된 후 내가 너에게 처음 낸 소리는 싸늘해진 네 앞에서 하는 통곡이었다 네 배가 불렀다는 걸 그제서야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