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사이가 소원해졌다고 하나, 여전히 애정이 있었다. 루이스와 트리비아 카리나는 연합의 공공연한 ‘애인’이었다. 이 이름에 걸맞게, 또는 사랑해서, 혹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그들은 다른 연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하루를 보냈다. 그 특별한 2월의 어느 날은, 이름만으로도 누군가를 설레게 하기에 충분했다. 거기다 하얀 눈이 내리면 금상첨화겠지. 달콤한 초콜릿을 즐기며 사랑스러운 연인과 함께 펑펑 내리는 눈을 본다면 멋지고 값진 추억이 되리라.
하늘이 라벤더빛을 옮을 시간이었다. 어김없이 한 잔 걸치자는 의견들에 얼떨결에 같이 따라나섰다. 말이 그렇지, 레베카의 주도 하에 루이스는 끌려 나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 사람들은 오늘이 무슨 날인지 모를 거라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고서야 이리도 무자비한 짓을 할 수가 있나! 오늘은 그래선 안 되는 세 번째 날이었다. 첫 번째는 화이트데이, 그리고 트리비아의 생일. 어느 한 쪽이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없었다. 그가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는 와중에 트리비아의 얼굴을 흘깃 보았다. 그녀의 어깨 위에 굴곡으로 모인 풍성한 머리카락보다 더 시선을 끄는 두 눈동자는 평소와 다를 것이 없어보였다. 그녀가 작게 한숨을 쉰 것 같았다. 루이스가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손들을 뿌리치고 연인에게 가려던 순간, 그녀가 외출을 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술집은 항상 소란스러웠는데, 그 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글만큼 술을 마시길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연합의 모두와 함께 마시는 시간은 즐겁다고 할 수 있었다. 웃고 떠드는 시간 속에서 많은 부담을 덜어낼 수 있었다. 잊으며 어깨가 가벼워지는 시간, 그는 그 시간을 즐겼다. 한편으로는 말없이 조용히 따라온 그의 연인이 목에 걸린 가시 같았다.
그러나 그 날은 오롯이 그녀를 위해 보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베일에 싸인 것처럼 도도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녀도 여잔데, 밸런타인데이에 연합의 사람들과 술을 마시는 시간이 달갑지 않으리라. 남자인 자신도 그런데, 여자인 그녀가 오죽할까. 루이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만 가야겠다고 했다. 아쉬워하는 소리가 들려 흔들렸지만 마음을 굳게 먹었다. 트리비아와 함께. 트리비아와 함께. 트리비아가 일어났고 곧 술집을 나갔다.
쌀쌀하다 못해 추운 때였다. 두 사람은 말없이 걸었다. 트리비아가 살며시 루이스의 팔에 자신의 팔을 감았다. 따뜻했다. 아무런 계획 없이 걷는 것이 좋았다. 그가 그녀의 집 앞에 다다랐을 때 그녀는 그녀답지 않은 웃음을 보였다. 흥미로워 보이기도 하고, 재밌어하는 것 같기도. 두 눈이 빛났고, 소녀들에게나 보일 법한 수줍음도 드러났다. 루이스는 트리비아가 평소와 조금 다르다고만 생각했다. 둘은 가벼운 키스를 나누고 헤어졌다. 그녀가 헤어지기 직전 건네주었던 쇼핑백은 밸런타인데이를 기념하는 선물이랬지. 그는 생각했다. 어째서 이 선물을 화이트데이에 돌려달라고 한 것일까?
* * *
화이트데이. 한 달 전에 비슷한 날이 있었는데도, 연인들은 오늘이 마지막 만남인 양 꼭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쉴 새 없이 사랑을 속삭이고 입맞춤과 포옹을 나누는데도 무엇이 그리 부족한지. 넘치는 줄 몰랐다. 이런 분위기를 안 탈 수 있는 게 아니다.
루이스는 연합에 가기 전 옷을 입을 때, 입고 있는 후드집업의 지퍼를 목 끝까지 올렸다. 평소에도 물 샐 틈 없이 잠그고 다녔지만 오늘은 더더욱 꽁꽁 싸매야 했다. 밖으로 나와서도 신경이 쓰여 몇 번이고 목을 매만졌다. 한숨을 푹, 푹 쉬었다. 손목을 바깥쪽으로 하고 세게 올리다 그만 놓쳐 손끝이 쓰라렸던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작은 신음을 내며 인상을 쓸 때 토마스가 조심스레 걱정하기도 했다. 루이스는 그저 괜찮다고만 말했다.
물론 전혀 설득력 없는 일. 오늘따라 루이스는 안절부절 못 했고, 그런 그의 변화는 거의 모두가 눈치를 챌 정도로 나타났다. 혹시 실례되는 말을 꺼낼까봐 망설이기만 했던 사람이 있었고, 안부를 물은 이후로 줄곧 신경 썼던 누군가가 있었으며(이 경우, 토마스였다.) 혹자는 긴가민가한 상태였다. 대부분 형식적으로 괜찮느냐는 말을 건네서 그는 계속 그렇다는 말을 했다. 루이스의 대답을 들었지만, 역시 영 시원찮았다. 트리비아는 홀로 떨어져 애인을 바라보았다.
대강 일이 끝나고 귀가하려 하자 엘리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가 얼굴에 모든 감정을 드러내며 진심으로 걱정을 해 주니 마음이 따스해지지 않을 리 없었다. 하루 종일 경직되었던 그도 이번만큼은 긴장을 풀고 아이를 안심시켰다. 그 뒤에서 이글이 얼음 능력자도 감기에 걸리느냐고 놀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가 꾸중을 했다. 그 틈에 루이스는 인사를 하고 연합을 떠났다. 트리비아가 조용히 따라왔다.
이 모든 원인은 트리비아의 밸런타인데이 선물이었다.
한 달 전의 그 날처럼 쌀쌀하다 못해 추웠다. 그래도 날은 많이 풀렸다. 두 사람은 말없이 걸었고, 트리비아가 루이스의 팔에 자신의 팔을 감았다. 집을 나서기 전 이미 한참 전에 굳어버린 루이스의 몸은 작게 움찔거렸다. 그녀는 도도한 얼굴을 요염하게도 바꾸어가며 자신의 애인을 어르고 달랬다. 간혹 루이스가 나지막하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애완동물 취급은 하지 말아달라고 했지만, 그녀의 귀에 들어올 리가. 아니, 들어와도 그 마음까지 울릴 리가. 그녀는 그녀답지 않은 웃음을 보였다.
그들은 트리비아의 집에 다다랐다. 루이스가 한숨을 쉬었다. 트리비아가 웃으며 왜 그러냐는 물음을 남겼지만 받아칠 필요는 없었다. 집에 들어가기 전, 앞에서 잠시 입술을 마주했다. 트리비아는 고혹적인 웃음소리와 함께 문을 열었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딱 한 달 전, 집으로 돌아가는 루이스의 머릿속에는 단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트리비아는 왜 선물을 돌려달라고 했을까? 이건 루이스에게 준 밸런타인데이 선물인데. 혹시 루이스가 쓸 수 있으며 트리비아와 함께 즐길 수 있는 도구일까? 그렇다면 굳이 ‘화이트데이’라고 콕 집어 말한 것도 설명이 된다. 육체적인 무언의 행위가 떠올라 루이스는 고개를 양쪽으로 저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냐며 자신을 꾸짖는 한편, 밤도 아닌 시간에 그런 걸 떠올리니 민망하고 불편했다.
집에 돌아와 선물을 풀어보니, 초콜릿들과 카드와 정성스레 포장된 네모난 상자가 보였다. 카드에 적힌 문구는 ‘Happy Valentine for Louis from Trivia.' 트리비아다운 문구였다. 카드는 붉은 색이었다. 그의 애인과 잘 어울렸다. 초콜릿을 집어 포장을 벗기고 작게 베어 물며 루이스는 선물의 포장을 뜯었다. 정성을 생각하니 미안한 반면에, 어떤 것이기에 이렇게 심혈을 기울여 포장했는지 궁금했다. 루이스는 침을 꿀꺽 삼키며 벗겨진 상자를 열었다.
열린 문, 그 안으로는 삭막한 집안이 보였다. 긴 복도와 현관문 바로 옆에 있는 신발장. 어두웠다. 루이스는 그 속으로 한 걸음 내딛었다. 트리비아는 루이스가 집 안으로 완전히 들어가자 자신도 들어갔다. 문이 끼익 소릴 내며 닫혔다.
루이스는 앞을 바라보았다. 모자를 정리해 목을 널널하게 해 주었다. 얼굴을 빼놓고 다 감추고 있었던 지퍼를 죽 내렸다. 그러자 붉은 목줄이 드러났다. 온통 파랗기만 한 그 남자의 몸에서 눈에 띄는 색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열심히 목을 감추었던 걸까? 아니, 굳이 색깔만은 아닐 거야. 그의 목에 딱 맞는 옷처럼 붙어있는 건 목줄이었다. ‘목줄’이라고 하면, 흔히들 생각하는 그것. 애완동물이 달아나지 않도록 채우는 목줄. 사납고 큰 동물을 다루어 길들이는 데에 쓰이는 목줄. 목줄. 자칫 허리띠라고 착각할 수 있겠지만, 허리띠가 왜 목에 감겨 있을까? 실제로 루이스의 목에 감겨있는 목줄은 허리띠처럼 보였다. 그러나 남성의 허리띠 치고는 꽤 화려했다. 붙어있는 쇳조각들은 표면이 매끄러웠고 모양이 잘 잡혀있었다. 빛이 난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그리고, 트리비아의 색을 담았다. 루이스의 빨간 눈동자가 가려졌다.
트리비아의 밸런타인데이 선물이었다. 그녀의 흥미와 바람과 함께 정성스레 포장된 상자에 담겨 있었던 선물이었다.
트리비아는 오른손 엄지, 검지, 중지로 루이스의 후드를 벗겼다. 푸른 머리카락이 눈에 띄었다. 그녀는 웃으며 곱게 쓰다듬고, 목줄의 뒤에 있는 고리에 가죽으로 된 끈을 걸었다. 끈을 잡고 손목을 돌려 한 번 감았다.
산책이 시작되었다.
트리비아 카리나는 어린 연인에게 자비가 없는 듯 했다.
아니야. 어쩌면 잊었는지도 몰라.
쭈뼛거리며 멀뚱히―엄밀히 말하자면, 적합한 표현은 아니다―서 있는 루이스의 다리를 발로 찼다. 그는 윽, 소리를 내며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두 무릎이 바닥에 세게 부딪혔다. 힘이 쭉 빠지고 다리가 욱신거렸다. 트리비아는 도도한 얼굴로 무릎을 꿇은 채로 앉아있는 루이스를 둘러보았다. 허리를 살짝 숙여 왼쪽부터, 그리고 오른쪽. 눈썹은 평소보다 위로 올라가 의문을 나타내고 있으면서도 두 눈은 반 쯤 감겨 지루해 보였다. 입술은 아무런 감정을 담지 않았다. 그녀가 루이스의 머리채를 잡고 고개를 확 젖혔다. 그의 얼굴에 괴로움이 비쳤다. 그녀는 깔보는 듯한 얼굴로 그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찡그린 미간. 그는 아무런 말을 않았다. 트리비아는 손을 놓고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루이스가 두 손바닥을 바닥에 짚었다.
트리비아는 무언갈 기대하는 듯한 눈동자로 루이스를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흥미를 갖고 있었다. 루이스는 생각했다. 어렴풋이 짐작은 했다만 이건 대체……. 과하다. 그래도 트리비아를 위해서라면. 배를 걷어차였다. 쿨럭 소리가 절로 났다. 트리비아의 힘이 이 정도로 셀 줄은 몰랐어. 옆으로 넘어진 그가 두 팔로 배를 감싸고 쿨럭였다. 바닥에 묽은 침이 뚝뚝 떨어졌다. 기침을 했다. 숨을 고르고 바닥에서 절박하게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지금 내 얼굴은 어떤 감정을 드러내고 있을까. 그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확실히 알 수 있는 건, 트리비아는 여전히 도도했고 깔보는 얼굴이라는 것이다.
기어.
못 알아들어?
어쩔 수 없지. 손과 무릎을 움직여서 앞으로 가.
냉랭하다 못해 엄격하고 차가운 명령조였다. 이 정도의 위압감이라면 그가 숨을 고를 때까지 참아준 게 오히려 감사할 지경이다. 루이스는 배를 약하게 문지르고 두 팔로 몸을 지탱해 일어났다. 머리가 핑핑 돌았다. 왼손을 먼저 뗐다. 그 다음은 오른쪽 무릎. 왼손으로 먼저 짚었다. 그 다음은? 역시 오른쪽 무릎. 다음 차례는 오른손과 왼쪽 무릎. 어지러워 정신이 혼미해지는 가운데 그 남자는 짐승처럼 네 발로 기어갔다. 두 손과 무릎이 그의 연인을 만족시켜줄 수 있는 발이었다. 연인의 오른쪽 입꼬리가 다물어진 채 높이 올라갔다.
짧았을 긴 복도를 네 발로 기어간다. 끝은 침실이다. 남자는 손바닥에 작은 티끌이 박히자 멈춰 손바닥을 살펴본다. 그의 연인은 자비롭지 않다. 높은 구두의 끝으로 갈비뼈를 걷어찬다. 남자의 입에서 깊은 신음이 나온다. 그녀는 말한다. 앞으로 질리도록 뱉을 것이니 아껴 두라고. 남자는 굴복한 짐승처럼 그녀를 바라본다. 그녀는, 조소. 그녀는 조소. 자, 자. 우리 어서 끝까지 가야지?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달랜다. 남자는 고개를 푹 떨군다. 어머. 안 가는 거니. 목줄을 세게 잡아당긴다. 그 강한 힘에 남자의 상체가 들린다. 두 손이 갈 곳을 잃은 듯 허우적댄다. 여자의 입가에 웃음이 사라진다.
“어서 끝까지 가야지? 나의―”
줄을 느슨하게 풀어 준다. 남자는 다시 숨을 고르고 왼손을 옮긴다. 주인에게 정복당한 짐승이다. 여자는 주머니 속에서 앞으로 쓸 것들을 꺼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