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의식주나 성욕, 식욕, 수면욕에 관련된 일에선 평소보다 상당히 무례해지는데, 변명 듣기 싫고 다 (끊겨있다)
2
돌아가면 머리카락을 자를 것이다. 꼭. 꼬옥. 꼬오옥. 어디까지 자를까 고민중이다. 머리가 기니 머리카락이 빠져도 많이 빠진 것 처럼 보인다. 그래서 내 방이 더러워보였다. 미용실 가면 한번에 단발로 잘라 달라고 해야지. 그럼 아마도 물어보시겠지? 무슨 일 있었냐고. 대체, 긴 머리를 자르는 여자에겐 무슨 일이 있었다 내지는 머리모양 바꾸는 사람은 무슨 일이 있었다 라는 공식, 누가 만든걸까. 사람이 그냥 자를 수도 있는거지 뭘. 샴푸 좀 많이 쓰고 방이 좀 지저분해져서 자를 수도 있는거지 뭘. 아무튼 어디까지 자를까. 목을 덮지 않을 정도로 짧게?
3
피곤하다... 나 잠 와.
4
여백은 좀 남겨 두어야겠다. 어차피 다 쓰지도 못할 거 의미없는 문자 몇 개 던져놓는 것과 마찬가지일듯. 잘 쓰지도 못하는 거 애꿎은 펜과 종이 낭비나 하지 말자.
5
도망쳐도 될 때가 온다면 난 도망칠 수 있을까?
6
친구가 말하길 '상처를 자각한 순간부터 아프기 시작해.' 내 생각엔 비단 상처 뿐만은 아닌 것 같다. 알아차리는 게 이토록 무서운 일인줄 몰랐지.
7
이정하 시인의 시가 참 좋은게, 사랑을 잘개 쪼개서 나온 한 조각을 글로 풀어낸다는 느낌이 들어서이다. 어쩜 그렇게 사랑시를 잘 쓸까. 시집과 에세이가 궁금해진다. 누군가를 좋아해 본 사람이라면 구구절절 와닿을 터.
8
날 용서해 내 공책아 난 좀 자야겠 (글씨가 엉망이다)
9
아 싫다
10
난 내가 어떻게 이 시를 외우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댄 굳이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나 역시 그렇게 될테니까 잠이 덜 깼나봐 내게 나오는 것이 내 것이 아니야
11
(펜으로 긁어대서 내용이 보이지 않는다)
12
영어 말하기대회 원고를 써야 한다. 수행평가가 잔뜩이다. 수행평가 끝나면 기말고사. 책임이란 누구에게나 당연히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난 가끔씩 도망치고 싶다. 누군가 어른이 되겠냐, 아이로 돌아가겠냐 묻는다면 난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아이로 돌아가겠다고 말할 것이다. 난 여태껏 아이로만 살아왔고 십년 전의 나나 별 다를 것이 없는데 이년 뒤면 내가 성인이라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는다.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난 아직 아이인데. 난 성인으로서 누릴 권리 따위 누리고 싶지도 않고, 그 권리에 따르는 책임은 더더욱 지고 싶지 않다.
13
내일이면 돌아간다고 하니 기쁘다. 아쉬운 마음은 없다(아마도). 그동안 참 심심했었나보다. 이곳에 올 때 너는 거의 텅 빈 공책이었고 지금 너는 거의 꽉 찬 공책이 되었다. 이곳은 새로운 곳이어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건져낼만한 걸 구상하진 않았다. 뭘 했나 싶다. 대충 훑어보면 의식의 흐름만 가득하다. 이렇게 또 종이와 펜 낭비를 했나 (쓰레기)
14
(한 페이지가 뜯겨있다)
15
내가 미쳤
런 일을 할 수
그만둬 상대는
도 알잖아 왜 안
아무 생각도 없다
람직하지도 않은 감
당장 때려쳐 이 미친
(사선으로 찢겨 있다)
16
그대 굳이 아는 척하지 않아도 좋다
찬비에 젖어도 새잎은 돋고
구름에 가려도 별은 뜨나니
그대 굳이 손 내밀지 않아도 좋다
말 한번 건네지도 못하면서
마른 낙엽처럼 잘도 타오른 나는
혼자 뜨겁게 사랑하다
나 스스로 사랑이 되면 그뿐
그대 굳이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
17
이상하다. 오늘따라 평소와 다르게 심장이 뛴다. 숨이 가쁘다. 설마, 이게 말로만 듣던 부정맥이 안 좋은 것?
18
이정하 시인은 시를 양산해내는데 그에 비해 퀄리티가 좋다고, 보통 이런 시는 질이 떨어진다고 말한 내 친구가 생각난다. 그 친구나 나나 서로 바쁘다. 아주 개성있는 그림을 그리던 친군데. 그 친구라면 무덤까지 셜록홈즈 시리즈를 안고 갈 것 같다. 나도 더 분발해야지.
19
뭘 망설여? 싶다가도 아주 갈팡질팡
20
나는 조금 많이 우울한 엘리자베스 베넷이 된 기분이었다.
21
―점점 무뎌지는 듯 하다가도 자꾸 생각나요. 제가 아직 그를 잊을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보여줍니다. 저도 생각하지 않으려 해요. 하지만 자꾸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굳이 잊으려 들진 않겠어요. 인정하고 다른 생각으로 돌릴거예요. 좋은 것만 생각할래요. 그래도 그가 좋아하는 것들을 좋아할 수는 없겠어요―
22
저는 확실히 정해야만 해요.
23
내가 했던 행동들은 때로는 선의, 때로는 어리광이었지만, 상대가 받아들이기엔 전혀 아닐지도 몰라요. 난 아무래도 좋은, 이상적인 여자친구가 되기엔 부족한가봐요.
24
(23과 이어진다)
아 뭐, 싫음 말던가.
25
급식 햄버거 나온 날이 생각난다. 맛있어서 두 개 먹었었는데.
26
역시 날 좋아하는 건 아니죠…….
27
아, 전남친 말인데요. 걔 안 돌아와도 됨. 필요 없음. 한 트럭 줘도 안 받아요. 뭐하러 그 허구한 놈만 주구장창 팠을까?
28
이 몸 삼기실 제 님을 조차 삼기시니
한생 연분이며 하날모랄 일이던가
29
나도 참 노트 한 권 자유롭게 쓰네 무슨 자유의 영혼인줄
30
(유일하게 멀쩡한 단면이다. 다른 단면의 글들은 찢기거나 낙서가 되어 있다. 공교롭게도 마지막에서 두 번째 장이다. 정성껏 쓴 글씨이다. 이 공책에 있던 그 어떤 글들보다도 더.)
못 참겠다. 그냥 확 인정하는 게 빠르겠죠? 내가 이 곳에서 만난 사람들 중 가장 좋아한 건 당신이었어요. 내 물과 잉크의 이야기도, 초코에몽 이야기도 다 당신을 생각하며 쓴 글이었다는 걸 방금 깨달았어요. 이게 한낱 소나기가 될지 아니면 당신을 잊고 나서 남아있는 녹슬고 찌든 감정이 될지는 모르겠다. 모든 걸 미워하지도 않고 피하려 하지도 않아요. 나도 참 이기적이야. 어찌되었든 잊는 건 나 뿐일텐데 그런 사람이 무책임하게 마음을 던져놓고 가요. 내가 너무 부정했나봐. 그래서 너무 늦었나봐. 지금 나는 그 어떤 것도 바라지 않아요. 부디 이 페이지를 찢어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