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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안즈] 아름다워 보여 012
리트윗, 마음, 감상 늘 감사히 받고 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012
침대에 앉아 책을 읽었다. 제목은 <춘희>. 그녀와 함께 서점에 갔을 때 샀었던 책이다. 인터넷에 검색을 해 보니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의 원작이라고 한다. 창부였던 마르그리트 고티에의 사후, 그녀의 물건들이 유품 경매에 들어갔다. 서술자는 비싼 값을 지불하고 책 한 권을 사 들인다. 그런데 어떤 남자가 찾아와 그 책에 얽힌 자신과 마르그리트의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그 남자의 이름은 아르망 뒤발. 처음엔 아르망의 마음을 몰라주었지만 후에 사랑을 위해 윤락 생활을 청산하였다. 그러나 아르망의 아버지가 마르그리트를 찾아가 아르망과 헤어져 달라고 부탁했다. 그 말을 듣고 그녀는 그를 떠났고, 죽는 순간까지 아르망을 떠올렸다.
인터넷 검색과 내가 읽은 내용을 섞어 대강 정리해보자니 이런 내용이 나왔다. 앉은 자리에서 손가락 두께만한 책을 다 읽었다. 책을 덮고 내 옆에 두었다. 침대에 누워 마른세수를 했다.
이런 표현이 웃기지만, 그녀와 내 사랑은 지금 어느 지점에 서 있을까. 그들의 사랑에 빗대어 보자면, 마르그리트가 아르망의 마음을 몰라주는 데에 있는 걸까. 그렇다면, 후에 그녀가 나를 사랑할 수도 있다는 걸까? 내 주변의 누군가가 그녀에게 나와 헤어져달라고 할까? 이건 너무 멀리 갔다. 전혀 실현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만.
우리가 그들의 전철을 밟지 않기를 바란다. 그녀를 영원히 놓쳐버린 아르망이 되지 않길. 나의 마르그리트가 되지 않기를.
구구절절한 이야기에 기분이 가라앉은 채 그녀 생각을 하니 당장이라도 만나고 싶었다. 마르그리트 고티에가 되어 사라지지 않을 것이란 확인을 받아 놓고 싶었다. 하지만 난 아직 조심스럽게 행동 해야만 했다. 나는 그녀의 마음도 모르고 있고, 우린 서로 합의된 연인 사이도 아니다. 그녀는 나의 연인이지만, 그녀에게는 아닐 것이다. 내가 그리워하는 만큼 그녀도 나를 그리워할까. 그의 반, 반의 반 만큼이라도.
어쩔까. 전화라도 걸어야 할까. 목소리만이라도 듣고 싶어. 하지만 연락처를 몰라서, 목소리조차도 들을 수 없었다. 그녀와 함께 하는 게 즐거워서, 같이 있을 땐 그 어느 것도 필요가 없어서…… 라고 스스로에게 변명했다. 어떻게 연락처를 모를 수가 있냐고 질책하다가 정신이 들었다. 그녀와 나는 그게 당연하게 여겨질 정도의 관계가 아니다.
그래도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나에게 하는 말이 아니어도 좋다. 수업 시간에 문학 지문을 읽는 소리라도 듣고 싶은데. 어쩌지. 참았다가 나중에 물어볼까. 아니면 케이토를 통해서? 나는 휴대전화를 들고 케이토의 번호를 띄워 두며 망설이다 통화 버튼을 터치했다.
전파가 안 터질까 걱정했다. 다행스럽게도 연결이 되었다. 전화기 너머에서 케이토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나는 케이토에게 혹시 그녀의 번호를 아냐고 물었다. 돌아오는 대답은 ‘모른다.’ 하지만 이사라 군이라면 알고 있을 거라고 했다.
케이토의 전화를 끊고 이사라 군에게 연락했다. 이사라 군은 내키지 않았을 테지. 그래도 번호를 내 주니 기뻤다. 자, 이제 그녀의 연락처가 있다. 케이토의 번호 대신 그녀의 것을 띄워 두고 고민했다. 지금 시간은 오후 여섯 시. 지금으로부터 두 시간 가량이 지나면 우리가 헤어졌던 시간과 엇비슷할 것이다. 이런 시간에 전화를 걸어도 되려나? 혹여 싫어하며 혐오감을 드러내지 않을까? 그러자 두려움이 몸을 감쌌다. 전등을 켜 두었는데도 주변이 새까매지는 기분이었다. 지금의 무관심한 태도와 이전의 경멸하던 태도. 둘 중 어떤 것이 더 괴로울까.
뭘 하든 괴로울 것이니 하고 싶은 걸 하고 괴로워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한정된 삶에서 느낀 건 생각한 만큼 괴로운 일도 드물다는 것이었다. 설마 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끔찍할까. 고운 네 미소를, 예쁜 음색을, 너를 담고 있는 아름다운 이 세상을 모두 떨쳐 버리고 싶을 정도로 끔찍할까. 아니. 그 정도는 아닐 거야.
스스로를 타이르며 통화 연결음을 들었다. 알 수 없는 노래. 일본어는 아니다. 유럽 언어가 아닐까.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노래는 꽤 신났다. 어떤 가사를 담고 있을지 추측하려던 찰나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목소리가 귓가에 감겼다.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떤 말을 해야 할까.
[이사라에게 들었는데, 혹시…….]
그녀 쪽에서 먼저 내가 말 할 무언가를 던져 주어서 나는 입을 열 수 있었다. 만약 그녀가 ‘여보세요?’만을 말했더라면, 계속 침묵 하고 있었을 것이다.
“나야.”
[어쩐 일이예요?]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느낄 수 있는 것은 두근거림. 설렘. 어쩜 이렇게 예쁠까. 나 때문이라면 기쁘겠지만, 나 때문이 아니어도 이런 목소리라면 얼마든지 기쁠 것이다. 다른 남자를 제외하고.
“네 목소리가 듣고 싶었어.”
[그래요? 흐음…….]
“기분이 좋아 보이네. 네 목소리에서 느껴져.”
이유가 알고 싶었다. 아니, 사실은 그녀의 기분이 좋으리란 보장이 없는데도 이 예쁜 목소리가 나로 인해 내는 거라고 듣고 싶었다.
[그래요? 영화를 보고 있어서요. 모처럼 기대하던 영화라.]
“어떤 영화?”
[오만과 편견.]
아, 내가 알고 있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 우리 사이에 새로운 공통점이 생겨 기뻤다.
“그거 보고 있는 거야?”
[네.]
“그런 거 좋아해? 옛날 거 말이야.”
[고전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나 옛날 영화 좋아해요.]
나중에 보여주겠다는 말을 삼켰다. 무언가라도 쥐여 주고 말해야 할 것 같아서.
정적이 흘렀다. 키보드가 탁탁 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손가락으로 장난을 치고 있는 것 같았다. 컴퓨터로 보고 있었나 보구나. 나와의 통화가 지루한 것일까. 아니면 별 의미 없는 손장난.
너는 내게 한 편의 시 같아서 네가 보이는 언행이나 몸짓 하나하나를 보고도 몇 배의 해석을 내놓아. 시어처럼 아름답고, 고유한 운율이 있는 너. 눈으로 읽을 때와 직접 겪을 때 판이하게 다른 너.
“네가 보고 싶어.”
지금 내 마음을 솔직히 표현한 말이었다. 나는 지금 바로 너를 만나고 싶어.
“당장 만나고 싶어.”
보고 싶단 말이 솔직하다는 거 취소하련다. ‘만나다’와 ‘싶다’ 두 단어가 들어간 이 문장이 내 마음을 대변한다. 이보다 더 간결하고 적절한 표현도 없을 거야.
[오실 수 있으면요.]
귀를 의심했다는 표현은 진부한데도. 나는 이미 그녀를 보고 내 언어가 극히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정말?”
[오실 수 있으면요.]
“갈게. 갈 거야.”
[집 앞에 도착하시면 연락 하세요.]
그녀는 내게 더 할 말이 없는지 확인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전화가 완전히 끊어져 대기화면으로 돌아오고 나서야 핸드폰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정말 가도 되는 걸까? 정말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연인의 집에 찾아갈 수 있는 특권을 부여 받은 것도 설렐 일이었지만, 무엇보다 그녀가 허락 해 주었다는 게 기뻤다.
이렇게 즐겁게 나갈 준비를 한 적은 거의 처음이라고 봐도 되지 않을까. 늘 병원, 학교, 아니면 집안의 이런 저런 일로 나가는 외출뿐이었으니까.
잠깐 볼 일이 있어 나갔다 온다는 충분하지 않은 말을 던져놓고 나왔다. 돌아오면 꽤나 피곤해질 것 같지만 그걸 감수할 수 있을 정도로 그녀가 만나고 싶었다. 가능한 빨리.
기뻤다.
그것도 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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