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안즈] 아름다워 보여 017
트위터에서 회지 수량조사 받고 있습니다. 오늘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https://twitter.com/songja_enstar/status/689466172626993152
017
무엇을 위해서 시간을 낸 걸까.
모종의 사정이 있었다. 학교가 일찍 끝났다. 방과 후의 일도 없었다. 모처럼 학생회는 바쁘지 않았고, 연습도 쉬는 날이었다. 그녀와 돌아다니기 최적의 조건이었다. 오늘은 다른 일이 있지 않을까. 새로운 곳을 갈 수 있지 않을까. 소망만으로도 가슴이 부풀어서 연락을 했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영 좋지 않았다. 오늘은 좀 피곤하다고. 이렇게 좋은 날도 잡기 힘들 것 같아서 아쉬웠다.
오늘이 아니면 어때. 앞으로 만날 수 있는 날은 많을 거야. 스스로 위안을 하니 기분이 나아졌다.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에이치.”
케이토가 나를 불렀다. 고개를 돌렸다. 내게 요즘 얼굴이 많이 좋아 졌다고 했다. 무슨 기쁜 일이라도 있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했다. 케이토는 안경을 치켜 올리며 별 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3학년 A반 교실은 금세 텅 비어 맑은 하늘만이 들어와 있었다. 그 속에 나는 덩그러니 서 있었다. 입가에 웃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왼손 엄지와 중지로 양쪽 입꼬리를 만졌다. 웃고 있었다. 이 기분이 새로워 소리 내어 웃어 버렸다.
“뭐가 그리 좋아요?”
여자애 목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리니 그녀가 서 있었다. 한 층 어두워진 얼굴에 축 늘어진 어깨, 문에 기대어 서 있는 몸. 힘겨워 보였다. 그렇게 느끼자마자 달려가 어깨를 붙잡았다.
“피곤하다고 하지 않았니?”
“그건 맞는데요. 그래도 올까 말까 생각 하다 왔어요. 밤을 거의 새다시피 한 것뿐이라.”
밤을 거의 새다시피 했다면서 전날과 비교해 컨디션 차이가 두드러지게 보였다. 많이 아픈 거 아닐까? 나도 이 정도는 아닐 텐데.
“그럼 집에 가서 자야지.”
“오늘 더 일찍 자면 되겠지요.”
그런 걸로 내 마음이 놓일 리가 없잖아. 그녀는 힘을 쭉 빼고 내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하루 종일 못 봤잖아요. 카페 갔던 날엔 그렇게 졸졸 따라다니더니.”
슬쩍 고개를 들고는,
“벌써 마음이 변한 거예요?”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귀여워 웃었다. 너는 이런 말도 할 줄 아는구나. 병약하신 분이 마음 하난 건강하단 말을 들을 땐 상상조차도 하지 못 했지. 나는 웃으며―절로 나와 말과 섞여 버렸다―말 했다.
“그럴 리가. 내가 따라 다녔던 거 알고 있었어?”
“솔직히 티 많이 났어요.”
“그래? 이런, 내가 널 많이 좋아하나봐.”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칭얼댔지만 내겐 나름의 근거가 있었다. 널 바라보는 데만 주력해 내 기척을 숨길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어제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냈기에 밤을 거의 새다시피 했을까?”
“잠이 오지 않아서, 뜬 눈으로 누워만 있었어요.”
몸이 아주 아플 때 잠에 들기 힘든 적이 있었다. 자면 좀 나아지리라고 믿고 누웠지만 눈이 감기지 않았다. 어쩌면 자느라 덜 느꼈을 밤과 새벽의 고통을 고스란히 느끼며 밤을 지새웠다. 그 기억이 나 어깨를 붙잡았던 손을 풀어 끌어안았다.
“아팠어?”
“여기 학교, 아니. 전혀요.”
학교라는 장소에서는 조금 힘든 걸까. 하긴 여긴 일반 교실로 다른 사람들의 출입이 자유로우니까. 쿠누기 선생님이라도 뵈었다가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오늘 맛있는 거 사 줄까? 아, 아니. 오늘은 피곤해서 무리이려나?”
“오늘은 조금 무리무리.”
무리무리. 그 말이 귀여워서 웃었다가 자주 웃는다며 타박을 받았다. 이런 널 두고 어떻게 자주 웃지 않을 수 있겠어.
“그냥 집에 가고 싶어요.”
그런 상태인데도 날 만나러 와 준거야. 기뻤다.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주는 것뿐이었다. 차량이라도 부르려고 했으나 차는 불편하고 힘들다 해서 걸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반은 잠에 든 모습이었다. 휘청 거리다 넘어질까 조마조마했다. 생각 보다는 잘 걸었다. 나 어쩌면, 그녀를 조금 더 건강한 상태로 봐야 할지도.
그녀를 만나고 나서부터 햇빛 아래에 있는 일이 많아 졌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의 가방에 달린 네임택을 보았다. 단순하고 깔끔한 디자인이었다. 여자애라도 저런 걸 쓰는구나. 귀여운 캐릭터가 그려져 있는 걸 쓸 것 같았는데. 거기에는 연락처와 학년, 반, 그녀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름. 우리는 서로를 이름으로 부른 적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이름으로 부른 적 없네.”
“그렇네요.”
그녀가 잠이 섞인 목소리로 대답 했다. 별 것 아니라는 듯이 말 하는 투에 잠깐 불안해졌다. 곧 안심 했다. 이제 확신이 섰으니까.
“내 이름 알고 있어?”
“알고 있죠.”
“내 이름이 뭐야?”
그녀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고는 말했다.
“제 목소리로 부르는 이름이 듣고 싶어요?”
내 이름은 물론이고 인칭대명사도 빠져 있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이제 그 정도는 해도 되지 않을까. 떠올려도 불쾌하지 않을 이름이라면, 불러 주는 게 좋지 않을까.
“저는 이름에 많은 의미를 두고 있어요.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조금만 진지하게 생각 해 보면 이름은 깊은 것이에요.”
한 번도 생각 해 보지 않은 것이라 흥미롭게 들었다.
“제 이름이 안즈인 데에는 필연적인 이유가 없어요. 살구꽃을 닮은 것도 아니고. 그냥 그렇게, 일방적으로 명명 되어 서류에 올랐을 뿐이잖아요? 누구나 마찬가지일 거예요. 저와 어떤 사이라고 생각하세요?”
잠시 생각 하다 자신 있게 말 했다. 이전이라면 불안했을 질문인데. 수천 장의 종이를 소비할 정도로 답을 내는 데에 많은 생각을 했을 텐데.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충족 시켜 주는 사이.”
너무 싱거운가?
“아니면 연인?”
“그럼 그에 걸 맞는 이름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조용히 납득 했다. 그럼 나도 네 이름을 부르는 데에 조심해야 겠구나. 그에 걸 맞는 이름을 지어서 붙여 주기 전까지는. 그러자 그녀는 웃었다.
집까지 가는 길, 손을 꼭 잡고 갔다. 그녀가 붙잡혀 있었을 뿐이지만. 손끝이 차가워 몇 번이고 입김을 호 불었다. 조금 건강하게 보자는 건 취소할까? 얼음장 같았다. 걱정스러웠다. 내가 누굴 걱정할 처지는 아니지만.
네 번째로 지나가는 어두운 골목. 그 앞에서 멈추어 섰다. 그녀가 의문이 가득 담긴 얼굴로 날 올려다봤다.
“있잖아.”
이젠 요구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 사이를 ‘연인’이라고 정의 할 수 있었다. 그런 사이라면, 부르는 데에는 신중해도.
“이제 사랑한다는 말을 해 주어도 되지 않을까.”
마음을 표현하는 일은 아끼면 안 되지 않을까.
그녀의 얼굴은 변화가 없었다. 내가 잘못 말 한 걸까? 그렇다면 화를 냈을 텐데. 마음에 안 드나?
“제게 사랑한다는 말이 듣고 싶어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지? 눈을 꼭 감고 이가 보일 정도로 입을 벌리며 어깨를 들썩였다. 푹 주저앉아 나를 안절부절 못 하게도 했다. 오래 웃었다.
“아하하, 정말 강아지 같아요. 방금 표정 어땠는지 알아요?”
그리고는 어떤 표정을 지었다. 눈썹은 약간 팔(八) 자. 눈빛은 초롱초롱해서 답을 원하고 있었고, 입꼬리는 웃음을 숨기지 못 해서 씰룩씰룩 움직이고 있었다. 이런 얼굴을 구현 할 수 있는 것도 대단하지만, 무엇보다 나는 너의 이 표정을 보아서 기뻐.
“만약에 꼬리랑 귀가 있었더라면 쫑긋 하고 양 쪽으로 격렬하게 흔들었을 것 같아요.”
내가 그런 얼굴을 했단 말이지. 웃겼다. 할 수 있구나? 할 날이 왔구나? 네 앞에서 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구나.
“정말……. 우리 학원 회장님께서는 강아지 같은 분이셨구나. 이거 다른 분들은 알고 계시는 걸까요? 나 혼자만 알긴 아깝네.”
말 하지 말라고, 장난으로 옆구리를 만졌다. 그녀가 악, 악 소리를 내며 옆으로 피했다. 그러다 넘어지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역시 생각보단 건강한 것 같다.
“사랑한다는 말은 참 좋지만, 그 흔한 말로는 이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없잖아요. 저라면 아껴 두겠어요.”
요리조리 잘 빠져 나가는구나. 그래도 그 모습이 사랑스러워서 웃었다. 네 덕에 많이 웃는다. 이러다간 몸이 아주 건강해지겠어. 그러면 좋겠다. 너와 함께 할 몸이라면 건강했으면 좋겠어.
내가 빤히 내려다보자 그녀가 눈을 감았다. 그대로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부위별로 하는 키스의 의미는 다 다르다고 하지. 온 몸에 키스를 하고 각각 다른 뜻을 부여해도 부족할거야.
“뽀뽀 더 할 거라면, 다른 사람의 눈도 생각하세요.”
퉁명스럽게 말 하는 모습도 사랑스럽다. 자연스레 어두운 골목으로 끌고 들어갔다.
“으응, 졸린데.”
“그래도. 조금만.”
꼭 끌어안았다. 너를 두고 무슨 말을 할까. 르네상스 피렌체의 제일가는 시인이 되어 너를 찬양하고, 너에 대한 시를 죽는 날까지 매일 여러 편 써도 부족할거야. 사랑해. 귀여워. 사랑스러워. 예뻐. 순진해. 발랄해. 맑아. 빛이 나. 요염해. 고와. 청순해. 매혹적이야. 오밀조밀. 환상적이야. 천진난만해. 순수해. 천사 같아. 함축적이야. 반짝반짝. 나의 공주님. 부드러워. 깊어. 군림하는 나의 여왕. 아름다워. 너에게서 느꼈던 단어들. 너에게서 느낄 단어들. 다 모아도 널 설명할 수 없을 거야. 난 널 이길 수 없을 거야. 아, 어쩌지. 좋아서 어쩌지. 내 사랑. 아름다운 내 사람.
네 몸을 끌어안고 있기만 해도 행복했다.
“이번 주말에 영화 볼까?”
“영화요?”
“제인 마치가 나오는 <연인> 맞지?”
“응? 맞아요.”
“구해 볼게. 또 보고 싶은 거 있어?”
“인터넷 서점에서 쉽게 구할 수 있을 거예요. 연인이 가장 보고 싶어요. 지금은 그 생각뿐이에요.”
연인. 우리 사이에 가장 어울리는 영화일까. 내용은 모르지만 야하다는 건 알고 있다. 그녀가 이렇게 고집 할 정도라면 야한 걸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다는 거야. 그렇다면 꼭 구해야지.
끝까지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주말에 만나기로 했다. 눈여겨 둔 곳이 있었다.
4659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