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많이 쌀쌀해 졌습니다. 조만간 첫 눈도 내리겠어요. 안녕하신가요? 에이치. 당신의 히비키 와타루입니다.
당신이 병원에 입원한 이래로 피네는 활동이 적어졌습니다. 거의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지요. 토리 군도, 유즈루 군도 각자 학교생활을 잘 하고 있습니다. 당신도 아시겠지만, 케이토 역시.
토리 군과 유즈루 군은 당신께 찾아가면 어떤 말을 하나요? 분명 염려의 말을 늘어놓겠지요. 케이토라면 어떤 말을 하나요. 보지 않아도 확실히 느껴지는군요.
편지를 쓰는 일은 생소했다. 글자에 내 마음을 담아내는 일이 쉽지 않을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막상 실제로 해 보니 평소에 자연스럽게 쓰던 단어는 외국어마냥 낯설어져서 완전한 문장이 나오지 않았다.
두 사람은 당신에게 다녀온 뒤 내게 당신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렇게 당신의 이야기를 전해 듣습니다. 들을 때마다 차마 맨 정신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황제시여, 제 마음을 아십니까. 당신을 염려하는 제 마음을 아십니까.
텅 빈 교실에서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하교할 학생들은 모두 떠났고, 이 학교에 남아있는 학생이란 나와 토리 군, 그리고 유즈루 군. 토리 군은 에이치에게 전화를 하러 잠시 자리를 비웠고, 항상 그렇듯이 유즈루 군이 따라갔다. 통화는 예상보다 길어졌고, 희미하게 토리 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의 상황이 아예 없는 것이었다면, 지금은 굉장히 평화로운 때일 겁니다. 노을빛은 부드럽게 교실을 감싸고 있습니다. 밖에서는 토리 군과 유즈루 군이 함께 전화 통화를 하고 있습니다. 사이가 참 좋습니다. 충실하다는 말도 어울리겠지요.
여기까지 썼을 때, 토리 군이 교실로 들어왔다. 얼굴이 썩 좋지 않았다. 역시, 그다지 좋은 이야긴 듣지 못했나보군. 유즈루 군의 얼굴도 좋아 보이진 않았다. 토리 군보다는 나았지만.
내가 물어보기도 전에.
“회장은 괜찮다고 하는데, 전혀 아닌 것 같아.”
히메 군이 울상이 된 얼굴로 말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었는데, 알아차린 건지 유즈루 군이 달래주려는 기색이 보였다.
보이십니까? 에이치. 느껴지십니까? 황제 폐하. 당신을 걱정하는 공주님이. 밝던 공주님의 침울한 모습을 보는 건 편한 일이 아니랍니다. 충실한 집사 씨도 마찬가지고요. 이런 모습이 계속 되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당신도 그런가요?
“토리 군, 이제 집으로 돌아가 보는 게 어떤가요……? 시간이 많이 늦었습니다!”
토리 군은 오늘의 저도 마음에 들지 않나 봅니다.
“이잇, 장발! 분위기 파악 정도는 하란 말야! 지금 회장이 많이 아픈데, 그렇게 밝은 말을 할 수가 있어? 회장에게 한 번도 방문하지 않고서!”
그 말에 웃었습니다. 하지만 토리 군은 제 마음을 알고 있을까요. 저 또한 마음이 유쾌하지 않다는 걸요. 우리의 황제께서 편찮으셔 병석에 누워 있는데 어느 광대가 마음이 유쾌하겠습니까? 이 히비키 와타루, 이 상황이 전혀 달갑지 않습니다.
애써 당신을 부인해 봅니다. 용서하세요. 당신을 부인합니다. 죄송합니다. 용서하세요, 황제시여. 당신을 만나러 가지 않는 나를 용서하세요. 당신을 마주할 자신이 없습니다. 애써 버팁니다. 이 모든 것이 꿈이라고. 언젠간 닥칠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현실이 되니 온 몸을 세차게 때리는 바람 같습니다. 당신의 모습을 보았다가는, 나를 지탱해주던 마지막 지지대가 부수어져 현실을 깨닫게 할 것 같습니다.
아아, 내가 맞닥뜨릴 현실이 꿈이라면 나는 영원히 잠에 들지 않겠습니다.
“후후후, 토리 군. 저에 대한 마음은 접어두세요. 이것이 사랑이라는 것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토리 군? 시간이 많이 늦었습니다. 아무리 유능한 집사 씨가 옆에 있어도, 공주님은 늦게까지 다니시면 곤란합니다.”
토리 군의 얼굴은 보기 드물 정도로 잔뜩 구겨졌다. 나는 토리 군과 유즈루 군을 어서 보내고 싶었다. 요즘 들어 부쩍 내 자신을 다듬을 시간이 필요해졌다. 에이치의 상태는 그저 잠깐 악화된 것뿐이라고, 다시 학교에 나와 우리의 황제 폐하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생각조차도 힘이 듭니다.
토리 군은 제 발로 돌아갔다. 다행이었다. 그랬다간 천 개의 말로 설득해 보냈어야 했을지도. 고대하던 시간이 생겨서 말없이 책상에 앉아 있었다. 나는 나를 다듬어야 했다.
지금 당신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외모는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미루어 짐작컨대 고고하신 당신께서는 아마 정리를 하고 계시지 않을까요. 이 모든 것을.
아아, 죄송합니다. 당신은 무사하신 것을.
한 문장 한 문장 써 내려가는 것이 힘이 들었다. 한 획을 써 내려갈 때마다 온 몸에서 거부를 했다. 실타래가 엉켰다. 펜을 잡은 손이 획을 그을 때마다 어긋났다. 글자가 삐뚤빼뚤, 보기 싫은 모양이었다. 글자가 내 마음을 대변했다. 눈썹을 찌푸릴 정도였다. 이런 글을 당신께 내 놓을 수 없지. 그렇지. 당신은 무사합니다. 난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건 다 착각일 것이라고.
보내지도 않을 편지를 쓰고 있는 이 손이 미워졌다.
당신을 한시라도 빨리 만나야 하는데.
헛구역질이 나는 문장이었다. 당신을 빨리 만나야 할 이유는 없었다. 우리에겐 시간이 많으니까.
“아직까지 있었군.”
고개를 드는 동시에 편지를 치워 버렸다. 케이토는 알아채지 못했다. 내 시간이 사라져 버렸지만 괜찮다. 그의 등장은 우물에 빠져 가라앉던 나를 꺼내 주었다. 그가 반가워 평소처럼 말을 건네려고 했지만 저지당했다.
“에이치를 만나고 오는 길이다.”
나는 그의 입에서 나올 다음 말을 기다리며 인내심 있게 있었다. 기분이 가라앉은 건 아니고, 호기심이었다. 나를 먼저 찾아 준 상대에 대한.
“에이치가 만나고 싶어한다.”
아. 갑작스러운 말이었다. 그는 병원과 병실을 알려주었다. 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안경을 치켜 올리고 자리를 떴다. 결정을 내리기까지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눈이 깜빡이는 그 시간. 이 말이 믿기지 않는다면, 숨을 들이켰다가 내쉬는 그 짧은 시간.
이 히비키 와타루, 당신을 위해서라면 거부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이 있는 병원으로 향했다. 가는 길, 그 길 내내 당신을 만나야겠다는 생각 뿐 이었다.
오 층부터 병동이었다. 당신이 있는 곳은 개인 병실이 있는 높은 곳. 한참동안 엘리베이터를 기다려서 그 곳까지 올라갔다. 긴장 되었다. 심장이 두근거렸고, 숨이 가빠졌다.
곧 당신을 만날 생각을 하니, 많은 감정이 교차했습니다. 마음의 준비가 많이 필요했습니다. 이 또한 불가피한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당신은 무사하시리라 생각했습니다.
에이치의 이름이 적힌 개인 병실. 문 앞에 섰을 뿐인데 벌써부터 찬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았다. 노크도 하지 않았는데. 들어가기 전 옷매무새를 다듬고, 머리를 가지런히 정리하고,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이런 내 모습이 우스꽝스러울지도. 내 상황을 알게 된다면 웃는 얼굴에 눈물을 그려 넣은 피에로처럼 생각할지도.
우스운 이야길 하는데 울 필요가 있나요?
들어오라는 말이 문 너머에서 들렸다. 아주 먼 곳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당신의 정정한 목소리. 얼굴을 보기도 전에 목소리를 듣고 마음이 놓였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드르륵, 또는 벌컥. 문이 어떻게 열리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 신경은 온통 에이치에게 쏠렸다.
나는 멎었습니다.
침대에 누운 채 고개만을 돌려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핏기가 싹 가신 얼굴. 당장이라도 달려갈 수 있었지만 느긋하게 걸었다. 가까이서 바라보니 창백한 얼굴이 다가왔다.
“와타루, 왔구나. 네가 보고 싶었어.”
조곤조곤하게 말을 하는 입술은 갈라졌다. 갈라지다 못해 피딱지가 앉았다. 메마른 입술이었다. 입술이 맞닿을 때마다 얇은 종이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두 팔로 상체를 지탱하며 일어나 앉으려고 했다.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옷이 감출 수 없는 야윈 몸이 드러났다. 그를 도울 수밖에 없었다.
안쓰러웠습니다. 이 모습이 황제인가요. 파들파들 떨리는 당신이 언제 질지 몰라 두렵습니다. 꿈이 아닙니다. 나는 깨어 있고, 내가 서 있는 이 지점은 분명한 현실입니다.
“도와 주어서 고마워, 와타루.”
미소가 여전했다. 내가 알던 에이치를 미소에서 찾을 수 있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에이치는 말없이 미소 짓고 있었다.
“자, 와타루. 어떤 바쁜 일이 있어서 그간 나를 만나러 오지 않은 걸까?”
말의 내용과는 다른 장난이었다. 나는 알 수 있었다. 대답을 추궁하지도 않을 것이고 변명도 원치 않는다. 알 수 있었다.
당신은 평소와 같았습니다.
“무지개 젤리를 사 놓았는데 말이야……. 참 아쉽기도 하지, 이런 곳에 들어와 앉아 있으니. 후후후, 나가기만 하면 가든 테라스에서 와타루와 함께 즐길 거야.”
“에이치. 그 말을 들으니 이 히비키 와타루, 기쁩니다. 그 훌륭한 것을 얻었을 때의 기쁨은 그걸 먹을 때마다 매번 느끼고는 합니다.”
다른 것을 느끼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이번에 새로운 홍차도 들여왔어. 영국제인데, 꽤 어렵게 구해 왔어. 홍차부의 활동이 있을 때 모두와 함께 음미해 보고 감상을 나누어야지.”
당신의 죽음이 가까워짐을 조금이나마 동정했더라면 그 동정을 거두어야 할 정도였습니다.
나는 동정을 거두었습니다.
“그렇습니까? 저도 그 홍차의 맛이 궁금해지는군요!”
“후후, 그렇게 말 해주니 기쁜걸? 와타루도 함께 음미 했으면 좋겠어.”
다음에 밥 한 번 먹자. 다음에 또 만나자. 다음에. 다음에, 다음에, 다음에, 다음에.
다음을 기약하는 그 모습에 저는 당신이 평소와 다름없다고 느꼈습니다.
“아까 케이토가 다녀갔어. 얼굴이 많이 수척해 보이던데, 걱정스러워. 안 좋은 일이 생겼나봐.”
“케이토는 늘 얼굴이 안 좋지 않나요. 하지만 에이치가 허락해주신다면 하루는 기꺼이 케이토의 광대가 되어 그의 표정을 더 부드럽게 만들어내겠습니다.”
“그럼 부탁해 볼까? 와타루는 항상 똑같네. 늘 보기 좋은걸. 보고만 있어도 힘이 나.”
이런 당신 앞에서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평소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 건 오직 당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이 일상의 한 부분으로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나의 글, 나의 마음, 나의 모습은 이질적인 것이 되어 빨리 제거해야 할 티끌이 되어 버렸습니다.
나는 이런 당신 앞에서 눈물을 흘릴 수가 없었습니다.
“Amazing! 에이치가 힘을 낼 수 있다면, 저는 늘 이런 모습을 유지 할 수 있습니다!”
눈물을 들키고 싶지 않았습니다. 말은 나를 가려주는 가면입니다.
눈을 초승달처럼 접었다. 내 몸인데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감정이 북받쳤다.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 어느 때보다 활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