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상고등학교] 잠이 안 와서 이런 걸 썼다는 내 어색한 핑계야
리트윗, 마음, 감상 늘 감사히 받고 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이다. 흡사 열대야의 밤 같다. 눈꺼풀은 무겁지만 잠 속으로 들어갈 수는 없는 밤이다. 마음이 심란했다. 요 며칠 새에 새로운 걸 너무 많이 배웠다. 조금씩 들여와 내 안에서 여과시켜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그런 여유도 없이 해일이 밀려오듯 내게 들어왔다. 복잡했다.
사람 마음이란 게 이리도 엉킨 실타래 같았나 싶다가도 이만큼 단순할 수 있나 라고 생각한다. 이걸 어떻게 풀어내야 하나. 미숙한 글솜씨로라도 정리를 해야 하나. 아주 멋진 단어다.
이부자리에서 일어나 밤을 뜬 눈으로 보내버릴 마음으로 책상 앞에 가 자릴 잡는다. 동짓달 뜨는 밤도, 겨울도 아니건만 요즘 내가 보내는 밤은 너무 길다. 이 기나긴 밤들을 둘로 나누어 찬장 속에 넣어 두었다가 필요할 때가 되거든 꺼내 오손도손 즐기고 싶다.
이런 면에서 황진이는 예술적이란 생각이 든다. 그녀 만한 표현력이 내겐 있을까. 있을까 하고 가볍게 생각해보는 것 조차도 오만이라고 느껴진다. 내 글솜씨가 미숙한 건 익히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펜을 잡아 봇물 터지듯 글을 써내려갔다.
내가 했던 말과는 달리 내가 너무 야속했어요. 당신에게 첫눈에 반했다는 말은 않겠어요. 당신이 부드러운 우유처럼 달콤한 사람이라고도 생각 안 해요. 운명이라 여기지도 않아. 낭만적이지도 않아요.
그런데, 그런데 어째서일까요. 어째서 내가 당신 속으로 잠겨버린걸까요. 뭐지. 왜지. 지금 이 감정은 뭐지. 왜 내가 당신을. 혼란스러워요.
지금의 나는 내가 원망스러워요. 내가 당신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했더라면 이런 일도 없었을거야.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것만 봐도 미친듯이 질투에 사로잡히는. 그런 일도 없었을거야. 아주 작은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해서 혼자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살면서 사소하더라도 애인을 가져본 적이 없어요. 애인이 뭐야, 다른 사람들 손도 타지 않았는걸. 항상 아무리 친해도 넘으면 안될 선을 확실히 그어 두었는걸. 그래서일까 더 가까이 하고 싶은 사람이 생긴 감정은 너무나도 낯설었어요. 이질적이어서 마치 먼지가 눈에 들어가 까끌까끌한 느낌이었어요. 하지만 초콜릿보다도 더 달콤해, 나는 헤어나올 수도 없었고 도망치려 하지도 않았어요. 그게 이렇게 큰 마음이 될 줄 알았다면 진작 관뒀겠지.
애써 부인하려 들지 않았었어요. 그저 예전처럼 한낱 봄바람일 뿐이라고 생각했어요. 잠시 설레인 가벼운 마음이거나 이루어질 것 같지 않아 빨리 포기한 안쓰러운 마음이리라 하고요. 그러나 의외로 강해서 나를 계속 채우다 못해 그 속으로 밀어넣고 결국은 침식시켜버려요.
그걸 깨달은 순간 끔찍했어요. 상대가 누구인지 똑바로 직시했어, 이 사람은 절대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저 나는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라고, 그 사람을 위해서라도 억지로 삼켜 목구멍 뒤로 넘겨야 한다고, 내게 강요하고 억압했어요. 나는 하고 싶은 일이 많은 사람이야. 이 마음은 가망도 없어. 현명하지 못해. 어리석은 일이야. 자존심 상하잖아? 네가 거절한 그 애들을 생각해 봐.
그런데도 못 버려? 정신 나간 년.
그런데 어쩌겠어요. 고삐 풀린 망아지마냥 걷잡을 수가 없어졌어.
당신을 좋아해요, 좋아하고 있어, 싫은 구석이 하나도 없어. 내게 전혀 가망이 없어도 난 당신을 좋아해요. 좋아할거란 기대는 하지 않아요. 좋아할지도 모른단 희망도 없어요. 그저 좋아한다는 하나의 감정만 있어요. 더 이상 바라지 않아요. 더할 나위 없어요. 내가 하고 싶은 걸 못 하게 된다 해도 당신을 좋아하게 된 걸 후회치 않을거예요. 나에게 이래저래 피곤하게 군 내가 밉지만 당신을 발견해서 참 예뻐요. 내게 새로운 길을 열어준 사람, '그런 면이 좋아서'가 아닌 '그럼에도 불구하고'인 사람, 내가 처음으로 알아본 사람.
그 사람인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퍽이나 예술적이다. 감수성이 펑펑 터질 시간대에 쓴 것이니 내일 아침에 발견하고 읽어 보면 부끄러움은 순전히 아침의 내 몫이리라. 이런 삼류 졸작은 세상에 내보이고 싶지도 않다. 아직은 성급한 마음이다. 확신이 생기지 않는, 날이 갈수록 진해지며 묽어지는 이상한 것이었다.
그만 두거라, 그만 두거라. 너에게 좋은 경험이 될 리가 없다. 네 자존심을 지키고 너만을 위해 살아라. 네 감정은 함부로 팔리지 않는 것이고 네 몸은 그 누구보다 순결하다. 너는 값진 것이니 부디 네 스스로를 낮춰가며 널 주려 하지 말아라. 닥쳐.
만감이 교차한다. 내가 지금 잘 하고 있는 건가? 그만 하지? 관두지? 점점 희미해지는 마음이다. 한편으로는 격렬하게 요동치고 있다.
응, 다 좋으니까 나 자게 좀 해 줘.
아직은 억누를 수 있을 만한 감정이야.
배고프다.
내일 시간표 뭐지.
보고싶다.
그만 둬.
피곤하다.
달빛이 어둡다.
기쁘면 노래할거야. 행복하게 노래할거야. 꽁꽁 숨기려 들었던 걸 감추지 않을거야... 라고 생각했다가 그만 뒀다.
실 한 가닥처럼 가볍고 얇아 입김만 후 불어도 금방 사라질 듯 하다.
아니다. 그 실이 얼마나 길고 누굴 옭아메고 있는지를 생각해.
모르겠다. 그냥 나 편한 대로 생각하련다. 글은 저렇게 썼지만 난 당신을 좋아하지도 않고 이 글을 당신에게 전할 생각은 더더욱 없다. 난 그렇다.
내게 확신이 든다면 난 이 글을 다시 재현 할 것이다. 내가 확신할 만한 일이 생겼을 때의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나는 종이를 잘게 찢어버렸다. 그 누구도 볼 수 없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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