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달 세 권 이상은 읽자. 지난 5월에는 지키지 못했다. 기말고사가 더 가까워지기 전에 세 권을 채울 심산으로 얇은 책을 골라 읽었다. 단언컨대, 생각 이상의 수확.
이 책을 쓴 존슨은 미국 흑인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자세히는 모르고 유색인 특히 흑인을 위해 몸을 바쳤다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가 가사를 쓴 <Lift Every Voice and Sing>은 흑인애국가로 불리고 있다.
주인공은 책이 출간되던 1912년에도, 그 전에도, 그 후에도 차별 받고 있는 흑인이다. 특이한 게 있다면 피부가 아주 하얘서 흑인이라 하지 않으면 백인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혼혈 흑인이다.
그가 자신이 흑인임을 인지하게 된 건 유년시절. 학교에서 백인 학생들이 일어날 때 주인공도 함께 일어났으나 선생님은 주인공에게 나중에 다른 학생들(유색인이 아닐까)과 함께 일어나라고 했다. 그 차별받던 시대에 주인공은 자신이 흑인인 걸 알아도 별로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흑인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했던 것 같다. 주인공은 피아노에 재능이 있었고, 그 재능은 그로 하여금 흑인을 나타낼 수 있는 음악을 하겠다는 꿈을 품게 만들었다. 확실히 그는 자신에게 자부심이 있었다.
흑인들이 사는 도시로 간 그는 흑인이라는 이유로 백인에 의해 불에 타 죽는 장면을 보고 자신의 피를 수치스러워하고 원망했다. 그는 도시를 떠나 백인들의 상류사회에 들어갔고 백인 여인과 사랑에 빠졌다. 자신이 혼혈 흑인이 아니길 바라기까지 한다. 결국 여인에게 자신이 흑인임을 고백했다. 여인도 고민하다 그의 청혼을 받아들였지만 아내가 된 백인 여인을 제외하면 상류사회 그 누구도 주인공이 혼혈 흑인이라는 걸 알지 못 했다. 아내도 죽고 자신의 꿈도 이룰 수 없게 된 그는 무기력한 사람이 되었다. 그게 내가 읽은 그의 마지막 모습이다.
한 마디로 씁쓸한 책이다. 주인공의 변화가 안쓰러웠다. 자기혐오가 서글펐다. 하지만 그 누가 그를 욕할 수 있는가? 차별받는 유색인으로서의 삶은 유색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생존의 위협을 받는다. 살기 위해 자신을 부정했을 터인데 누가 그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명예도 돈도 여자도 아닌 사람으로서의 아주 기본적인 생존 때문인데.
놀랍게도 이 책은 인종 차별 외에도 현재의 국제사회에 대입할 수 있는 구절이 많았다. 앞서 말한 생존에 대한 위협은 21세기의 여성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강력 범죄에 쉽게 노출된다. 강제로 할례를 당한다. 모르는 이성의 시선을 받는다. 명예 살인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단지 여성이기 때문에. 비단 여성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최근에 미국에서 일어난 올란도 총기난사 사건 또한 동성애자가 자주 가는 클럽에서 벌어진 일인데, 이는 동성애자(게이가 많이 가는 클럽이었다고 한다)이기 때문에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책의 구절을 떠올려보자면 여성을 성녀와 창녀만으로 나누는 즉, 이분법적인 구분이라던가, 강자가 약자의 이미지를 희화화 시키며 고정하는 것이나 동성끼리 결혼하면 지구가 멸망이라도 하는 줄 아는, 멸시와 혐오를 기반으로 한 역사 깊은 가치관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작가가 소설 속에서 쓴 말마따나 ‘백인들은 아직도 완전히 현대에 살고 있지 않은 것 같다. 그들이 공유하고 있는 많은 생각들은 전 세기, 아니 어떤 생각 등은 중세에 머물러 있다.’
작가가 의도한 바는 아닐지 몰라도, 21세기의 독자인 내가 얻은 교훈은 ‘100년 전과 지금의 차별은 달라진 게 없으며 단지 차별 받는 대상이 늘어났을 뿐이다.’ 그동안 비장애인이자 이성애자인 남성들에게 가려졌던 여성, 동성애자, 장애인, 어린이 등 사회적 약자는 이르면 19세기 이전, 늦으면 20세기부터 조명을 받고 있으며 이 차별을 완화시키는 과정조차 오랜 시간이 소요된다. 누군가는 ‘그냥 살아!(본인이 약자가 되어본 적이 없으니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라고, 혹은 ‘너희들의 권익 향상에 좋은 감정을 갖고 있었는데, 이젠 아니다!(오빠가 허락한 여성의 투표권 혹은 페미니즘 정도가 적절하겠다!)’ 라고 말 할 수도 있다. 지금 당장은 ‘왜 이렇게 예민하게 굴어, 생리해?’ 라는 소리를 들을지도 모르겠으나 글쎄, 내 생각엔 이런 약자들의 권익 운동이 계속되고 있는 것은 결국 모두가 더 나은 사회에서 살기 위함이다.